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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종교에세이 > 기독교
· ISBN : 9788996723400
· 쪽수 : 100쪽
· 출판일 : 2011-09-26
책 소개
목차
책을 내면서 7
나를 낳아주신 울 엄마 최범식 권사님 10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 12
어렸을 적 우리 엄마는... 26
어쩜 그리도 나를 닮았을까 39
한 주가 아니 하루가 정말 빨리 지나간다 51
오늘이 오늘임에 감사한다 53
나의 시어머니이신 정순섭 권사님 60
나에게 축복의 딸이 되라고 기도해주신
박정희 선교사님 78
끝맺음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를 낳아주신 울 엄마 최범식 권사님
우리가정은 처음부터 예수 믿는 가정은 아니었다. 아빠는 예전부터 기독교 집안이셨는데, 무교 집안인 하숙집 딸과 결혼하셨고, 그분이 우리 엄마이시다. 교회는 안 다녔지만, 어렸을 때 기억으론 가끔 예배드리러 한두 번은 다녔던 기억은 난다.
교회도 안 다니면서 초등학교 때 학생신상조사서에서 종교는 꼭 기독교라 썼으니, 아마 아빠의 영향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던 중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엄마가 충무교회 배혜경 권사님의 전도로 충무교회에 나오게 됨으로써 우리식구 전체가 충무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나와 충무교회의 끈이 된 것이다. 그때가 1979년 이었고, 지금의 충무교회 위치(회현동)는 맞지만 지금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지금의 본당은 그때와 같지만, 교육관의 자리는 단층의 건물로 그때는 중고등부가 각각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운영될 정도로 무척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다. 공과공부를 제외한 모든 것을 학생회 중심으로 운영되었었다. 그러니 중학교에 들어가 예배드리고, 학생회 활동하면서 점점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던 전형적인 A형인 나는 차츰차츰 A형이지만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나도 모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
2001년 12월 4일
큰 아이 은비와
작은 아이 수아의
엄마 이은경
내 나이 36세.
16세 때는 그저 얼른 커야지, 얼른 어른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26세 때는 어서 결혼해야지, 늦기 전에 결혼해야지 하는 조바심으로
36세 인 지금은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
흔히들 넓고 넓은 어머니의 마음, 무조건 하염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사랑, 모든 근심을 다 묻어버리고 싶은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을 많이 말한다.
그러면서 나를 뒤돌아 본다. 난 어머니인가?
난 아니라고.. 아직 어머니가 되기엔 덜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과 씨름하기 바쁘고, 아이들 때문에 삐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하고, 똑같이 성질부리다 지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는 아직 어머니가 되기엔 많이 모자라기만 하다.
내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돌아본다. 힘든 모습보다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셨던 분, 내가 힘들어도 아이들에게는 내색을 안하셨던 분, 약하고 작은 몸이지만 덩치큰 나보다도 강인하셨던 분.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 내 앞에는,
똑같은 모습으로 잠을 자는 두 아이가 있다.
아침마다 옷 투정으로 잠투정으로 골을 부리다가, 어느 날은 너무나도 기분 좋게 예동 갈 준비를 할 때면, 그 모습이 마냥 기특한
둘째 녀석.
어느새 제법 글을 읽어가며 재미를 느끼는 모습, 표현력 있게 말하려는 모습에 절로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아이.
내 사랑하는 둘째 아이이다.
퉁퉁거리며 곧잘 자기표현을 한답시고 심통도 부리지만,
엄마 힘든 걸 보면 아무 말 없이 청소도 하며, “엄마 사랑해”하며 애교도 부릴 줄 아는 큰 아이.
자칭 “나는 천재야”하며 자신감있게 피아노를 치며, 그림을 그리며,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해내지만,
아직도 겁이 많은 아이, 내가 사랑하는 첫째 큰 녀석이다.
한 줄 한 줄 아이에 대한 모습을 적다보니, 아이들이 힘들게 하였던 모습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모습들이 스쳐지나간다.
내 어머니도 그리했으리라.
나의 허물보다 나의 조그마한 장점도 큰 바위같이 여기셨던 분.
나는 이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점점 어머니의 모습으로 닮아가려 한다.
내 의지가 아닌 자연스레 동화되는 모습으로.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더 빨리 그 모습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과 투쟁 아닌 투쟁을 한다.
사랑의 투쟁, 엄마의 투쟁을...
결혼을 할 때가 생각난다. 우리는 당시 아동부에서 부감으로 봉사하시던 박정희 선생님과 중고등부 전도사님의 소개로 내 남편 최훈 집사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동부와 중고등부의 예배시간은 차이가 났다. 지금은 아동부가 11시 예배, 중고등부가 10시 40분 예배로 시간차이가 20분밖에 나지 않지만, 내가 봉사하고 있을 1992년만(나는 그때 아동부 교사 7년차였다. 27살) 해도 아동부는 10시, 중고등부는 9시 30분 예배로, 아동부 교사는 1부 예배(7시30분)를, 중고등부 교사는 2부 예배(11시)를 공예배로 드려야 하기에, 같은 교회에서 다니지만 부서가 다르면 예전부터 알았던 사이가 아니면 알 수가 없었다.
최훈집사는 강원도에서 서울로 직장관계로 올라온 뒤, 같은 학원에 근무하시던 박봉규집사님의 인도로 우리 충무교회에 등록하게 되었고, 강원도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터이기에, 자연스레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청년부의 활동은 지금의 청년부 활동처럼 대단히 역동적이어서, 청년부가 속하지 않는 부서가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하였다,
난 1부 성가대로, 아동부에선 성가대지휘자(율동교사에서 성가대지휘자로 승진(?))로, 수요 예배땐 찬양인도로(회사가 명동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진행하게 되었다), 부흥 집회땐 청년부 찬양단으로, 청년부에선 임원으로 토요일(당시 청년부는 토요집회를 가져서 청년부자치예배, 말씀공부와 2부 활동을 하였다)과 주일은 온전히 아니 다른 날에도 그래서 나의 하루 24시간을 구분해 보면 학교, 교회, 아르바이트, 집이 전부였을 정도로 무지무지 활동적인 학생으로 바삐 살아가고 있었다.
대학교 3학년인지 4학년 때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부흥 집회 때 목사님이 해주셨던 말씀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년부회원들과 준비찬양을 마치고 예배당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았었다. 부흥회 2째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은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찬양을 부르고 앉아있던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이런 질문은 하셨다.
“앞에 자매들을 보니, 이제 곧 결혼적령기에 다다를 것 같은데, 미래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난 그때까지 너무 바쁜 대학생활을 하였기에, 가정형편상 방학 때나 학기 중에도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에, 나에겐 대학 써클 활동은 엄두도 못 내었고, 그나마 고등학교 동문회에만 참석하였지, 내 미래에 대해선 내가 이룰 가정에 대해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오늘 24시간 충실히 지내고만 있을 때였기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시면서
“생각 안했다면,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노트에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기록하세요. 그것도 두리 뭉실하게 말고 예를 들어 키 큰사람, 마음씨 착한 사람 등 이런 기도 말고 구체적인 기도, 즉 키가 180cm이상인 사람이면 좋겠다는 식으로 좀 이건 너무 하다싶을 정도로 구체적인 기도를 드려보세요.”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이 내 맘속에 꼭 깊이 박혀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부터 노트하나에다가 기도문을 만들어 나갔다. 내 배우자를 위한 기도문을..
그 기도문중에 몇가지를 들자면,
① 나는 키가 큰 사람은 싫다. 그렇다고 나보다 작은 사람은 싫다. 내 키가 165cm이니까 나보다 조금 큰 사람이면 좋겠다. (이 기도 들어주셨다. 우리 신랑이 나보다 3cm더 크다)
② 내가 장녀인데, 우리부모님이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셔서, 나는 우리 힘으로 가정을 이끌어 갈 사람이면 좋겠다. 그래서 내 남편도 장남이면 좋겠다. 막내만 아니면.. 막내는 왠지 독립심이 약할 것 같아서..
부모님께 받아서 생긴 부자가 아니라, 부모님께서 대학까지 공부시켰는데, 그걸 가지고 살아가면 되지 않을 까.
(이 기도도 들어주셨다. 우리 신랑은 3남매의 장남이다)
③ 난 성격이 못됐다. 성격은 정이 많고 눈물도 많고 착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꼼꼼하고 정확해서, 일처리가 두리 뭉실하고 약해보이면 난 그 상대방을 이성이라면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에, 나를 확 휘어잡아주고 이끌어줄 사람이면 좋겠다.
(이 기도도 들어주셨다. 사리분별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난 대꾸도 못한다. 맞으니까..)
④ 신앙인이더라도 같은 생각을 하는 신앙이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다르면 무 신앙인보다 더 심각하기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면 좋겠다. 등등
기도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오늘의 생각이 여기 까지 미치면 거기까지 기록하고, 다음에 또 이런 생각이 들면 추가하고 수정하면서 계속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막상 결혼할 연령이 되면 우리는 항상 빨리 결혼하고 싶다. ‘내님은 누구일까? 어디에 계실까? 하는 가요처럼, 내 앞에 내가 상상하던 사람이 뚝딱하고 나타나기만을 소원했지, 정작 그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지는 못했다. 그것을 목사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이었나 보다.
그러던 중 두 분의 중매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것도 드라마틱하게...
1992년 3월의 어느 날(솔직히 그 날만은 기억나지 않는다.) 퍼시픽호텔 커피숍에서 이 사람을 만났다.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데, 아 이사람이구나 하는 확신이 점점 생기는 것이었다. 내가 기도했던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