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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6975403
· 쪽수 : 376쪽
책 소개
목차
책 머리에 366
프롤로그 369
에필로그 369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느낌이 있다. 체포되기 전에도 늘 그랬다. 이번에는 잡혀가겠구나, 하면 어김없이 그랬다. 스물여섯 번 중에 어느 한 번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나는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 체포는 피하지 않은 것이고,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러나 그 차이도 사실은 차이가 아니다. 나는 지금 꼼짝 못하고 병상에 누워 있다. 겨우 눈동자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난 시절에도 나는 여러 번 꼼짝없이 묶인 채 내 운명을 지켜보아야 했다.
아내는 지금 자기가 반드시 나를 일으켜 세울 테니 지켜보라고 당신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데, 아니다. 이십육 년 전에는 인재근이 나를 살려낸 것이 맞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싫지만,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내 기억의 편린을 정리하는 것은 이제 내 몫이 아니게 되었다. 어떤 것은 현실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고, 하지 못하게 한 이야기도 있다. 여전히 하지 말아 주기를 바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제는 이것도 내 몫이 아니게 된 것 같다.
나는 그 이발소가 싫었다. 목을 아프도록 조여 매는 보자기가 너무 더러웠다. 버짐이 핀 아이들의 머리를 밀었던 바리캉도 싫었다. 뒷머리와 옆머리를 미는 바리캉은 무디기까지 해서 머리칼을 자주 씹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싫은 것이 있었다. 생머리가 빠지는 아픔 때문에 몸을 비틀며 인상을 찡그리면 이발사는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엄살을 부린다며 목덜미를 꽉 눌러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말과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내 목을 잡은 이발사의 손이 주는 느낌은 그것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 이질감이 아주 싫었다. 손으로 내 목을 누르는 그가 실제로 억누르는 다른 무엇을 나는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했다. 내가 교장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바리캉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화를 냈을 것이다. 더 싫었던 것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이발사가 나를 앉혀 두고 아버지를 속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사람 옆에서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아버지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비굴한 타협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 눈길을 잡아당기는 것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주장하는 아이의 입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목덜미였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조금의 떨림도 없이 그 아이의 미끈한 목젖을 타고 미끄러져 나오는 이 어휘가 내 목에는 가시처럼 걸렸다. 한 끼라도 굶어 보았을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반복하는 그 아이들의 ‘결사반대’에 나는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