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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88997253982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3-11-27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대문으로 오르는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는 느낌은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저녁을 먹고 준혁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눈에 익은 동네에 다다랐다.
사실 영채는 자신이 어디어디를 다녔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곁에서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준혁의 존재만이 점점 더 강하게 인식될 뿐이었다.
긴 골목을 걸어와 대문 앞에 도착하고 보니 되는 대로 집을 뛰쳐나간 것이 바로 하루 전의 일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았다.
조롱 속에 갇힌 채로 사육 당하던 새가 어느 순간 자유로운 바깥세상을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준혁의 점퍼를 걸치고 중간 참의 계단에 앉아 골목 어귀에서 사 갖고 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영채는 되도록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괜찮겠어?”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안 그래?”
“사장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텐데, 그래도 겁 안 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영채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다시 아이스크림콘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 아이스크림, 정말 맛있다. 나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하얀 아이스크림이 좋더라.”
“알아.”
“알아? 어떻게?”
“너 원래 그렇잖아. 우유도 흰 우유만 좋아하고.”
어떻게 알지, 하는 얼굴로 영채가 옆에 앉은 준혁을 쳐다보았다.
영채의 코끝에 아이스크림이 하얗게 묻어 있었다. 마치 어린 아이 같은 그 모습에 준혁이 피식, 웃어 보였다.
“왜?”
“여기, 아이스크림이 묻었어. 잠깐만 이렇게 해봐.”
영채의 턱을 잡고 코끝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는 준혁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마로 그의 느릿한 숨결이 쏟아졌다.
어쩐 일인지 영채는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니, 눈을 마주치는 것은 고사하고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입 안에 침이 마르고 공기가 모자란 폐가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빠르게 펄떡거렸다.
입을 벌리면 심장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꼭 감고 잔뜩 긴장한 채 얼굴을 맡기고 있는 영채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냥 단순히 귀엽다기보다 늘 강단 있고 씩씩해 보이는 이면에 숨겨 있는 여성스러움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웃고 있던 준혁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눈앞으로 빨갛게 피어나는 장미꽃 같은 영채의 입술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의 턱을 쥔 준혁의 손에 짐짓 힘이 들어갔다.
그의 감정을 느낀 것인지 눈까지 꼭 감은 영채가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틈을 타고 준혁의 바삭하게 마른 입술이 영채의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위로 망설이듯 수줍게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환한 불빛에 깜짝 놀란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떼고 벌떡 일어섰다.
시동도 채 끄지 않은 차에서 천둥처럼 고함을 지르며 신 회장이 구르듯 달려 내려왔다.
“네이노옴!”
“회, 회장님! 잠시만 진정을, 고정하십시오. 회장님!”
까만 어둠속에서 스포트라이트처럼 자동차의 불빛이 놀란 준혁과 영채를 비추고 있었다.
놀라고 당황한 그들이 상황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날듯이 달려온 신 사장이 무지막지한 주먹을 준혁에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악!”
“아빠! 아빠, 이러지 말아요. 오빠, 오빠아!”
“사장님! 사장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사장님!”
정신없이 매달리는 영채와 있는 힘껏 신 사장을 말리는 한 기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또래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고는 해도 어른인 신 사장의 완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준혁은 땅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린 채로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신 사장의 손찌검과 발길질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아빠! 제발 이러지 마. 그만하라고.”
영채의 비명이 골목 안을 메아리쳤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 신 사장은 더욱더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놈! 이 개만도 못한 놈. 감히 어디서 주인 집 딸을 넘봐, 넘보기를. 네까짓 놈이 뭐라고 감히 우리 영채에게 못된 생각을 품는 게야.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
“그만, 그만 고정하십시오, 사장님. 제대로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를…….”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을 뒹구는 준혁에게 차마 시선도 주지 못하고 한 기사는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시끄러워. 이대로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자식새끼하고 오갈 데 없다는 것들을 거둬줬더니 이따위로 은혜를 갚아? 그 애비에 그 자식이지. 저리 꺼져, 이 새끼야!”
“악, 아저씨!”
급기야 불똥이 한 기사에게로 떨어졌다.
자신의 다리를 붙들고 애원하는 한 기사를 신 사장은 구둣발로 걷어찬 것이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저만치 나가떨어진 한 기사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전날 밤, 자신의 재혼을 두고 영채가 쏟아내고 나가버린 분노가 고스란히 준혁 부자에게 떨어진 것이다.
바들바들 떨며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영채를 관찰한 신 사장은 그쯤하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모든 칼자루는 자신이 쥐게 되었으니 희정과의 생활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네년이 아무리 까불어봤자 이 애비 손바닥 안이다.’
싸늘하게 조소를 흘리며 신 사장이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밤중에 집을 뛰쳐나가 하루 온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겨우 나타나서 한다는 짓거리가 고작 사내놈하고 연애질인 게야? 그것도 고등학교도 중퇴한 운전기사 아들놈하고? 아주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 하는 짓거리하고는 꼭 제 어미를 닮았지. 에잇, 재수 없어. 고상하고 잘난 체는 혼자 다 하더니 꼴좋다.”
자신의 딸에게 마지막으로 일갈하고 신 사장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차마 아래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골목에서 벌어진 모든 난리를 지켜본 희정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영채와 집 안으로 들어간 신 사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 오빠!”
“저리 가.”
“오빠, 괜찮겠어? 여기 피가…….”
“저리 비켜! 손대지 말란 말이야.”
벌벌 떨며 다가와 자신을 일으키려 하는 영채를 준혁이 거칠게 밀쳐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자신의 소매로 슥슥 닦아낸 준혁이 정신을 잃은 듯 쓰러진 한 기사에게로 다가갔다.
멍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영채에게는 싸늘한 눈길 한번 보내지 않았다.
가면을 뒤집어쓴 듯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한 얼굴의 준혁이 너무나 낯설어 영채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세요.”
“준혁아,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이, 이제 어쩌면 좋으냐?”
“뭘 어째요? 예전처럼 살면 되는 거지. 가요. 일단 여기만 떠나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는 아버지를 간신히 부축한 준혁은 당황하고 또 무안해서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영채를 외면하고 무겁게 자리를 떠났다.
준혁의 상처 입은 뒷모습은 가득하게 고인 눈물로 인해 흐릿하게 반사되었다.
‘오빠…….’
영채는 골목 어귀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