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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설교/성경연구
· ISBN : 9788997339525
· 쪽수 : 429쪽
· 출판일 : 2020-06-15
책 소개
목차
서문 / 11
제1부 복음서들은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복음서들의 구성 원리
1장. 문제 서술, 무대 설정 / 27
2장. 예수를 역사적 상황 속에 설정하기 / 39
3장. 구전 단계: 침묵의 터널로 들어가기 / 55
4장. 공관복음서를 구성한 단서 찾기 / 71
5장. 마태가 의존했던 마가 / 83
제2부 유월절 이후부터 오순절까지: 초기 사역의 탄생
6장. 예수의 족보와 탄생 / 89
7장. 요셉: 신화인가 역사인가? / 111
8장. 동방박사들과 선물: 독창적인 설교? / 121
9장. 헤롯과 파라오 대 예수와 모세 / 131
10장. 예수의 세례: 모세의 재현 / 137
11장. 광야 속으로: 40년이 아니라 40일 / 143
제3부 오순절과 산상설교: 다시 시내산으로
12장. 상징적인 시내산으로 돌아온 예수 / 153
13장. 주님의 기도 / 165
제4부 신년절과 속죄일: 기적들과 가르침
14장. 오순절에서 신년절까지의 예수의 여행 / 179
15장. 마태의 예수 소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 189
16장.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태의 작업 / 197
제5부 속죄일: 속죄 신학에 대한 도전
17장. 욤 키푸르 소개: 속죄의 날 / 207
18장.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비신비화 / 219
19장. 속죄 신학의 저주 / 229
제6부 초막절 이후: 새로운 추수
20장. 초막절의 상징들과 굶주림을 채워주는 음식 / 253
21장. 세례 요한의 참수 / 263
22장. 빵과 물고기, 물 위를 걸으심: 모세 이야기들을 확장한다 / 273
23장. 두 인물, 두 통찰 / 285
제7부 수전절(하누카)과 주님의 변모: 하느님의 빛에 대한 재해석
24장. 수전절: 하느님의 빛의 귀환 / 301
25장. 예수의 변모: 수전절(하누카) 이야기 / 311
제8부 유월절을 향한 여행: 묵시와 심판
26장. 마태복음의 여행 부분에 대한 소개 / 323
27장. 여행의 핵심 / 333
28장. 실현된 묵시: 최후의 심판 / 347
제9부 유월절과 수난: 절정
29장. 수난 이야기의 절정 사건 / 357
30장. 해석의 단서를 찾기 위한 수난 이야기 탐구 / 367
31장. 전례로서의 수난 이야기 / 379
제10부 마태의 부활절 이야기: 새로운 관점
32장. 부활의 새벽: 신화인가 실재인가 / 395
33장. 생명을 향한 마태의 초청 / 411
참고문헌 / 421
리뷰
책속에서
이 책에서 나의 사명 중 하나는 유대적인 것 전체에 대해 이방인들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녀왔던 무지의 층들(the layers of Gentile ignorance)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런 무지함은 신약성서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접근방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사실상 성서 근본주의는 그러한 무지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얼마나 깊이 유대적이며, 유대인들의 경전과 역사, 예배방식(Jewish patterns of worship)을 얼마나 많이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제 복음서들을 올바르게 읽으려면 유대인들의 문화, 상징, 성상(icons), 그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이야기 전달방식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이 “미드라쉬(midrash)”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만이 복음서들을 문자적으로 읽도록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이와 동일한 무지가 수세기 동안, 동정녀 탄생, 기적, 수난 이야기의 세부사항, 육체적 소생으로서의 부활 이해, 시공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서의 우주적 승천 같은, 예수의 생애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문자주의적으로 방어할 필요성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만들어냈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성서 문자주의를 이방인들의 이단(a Gentile heresy)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주의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반드시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그리스도교 교회 스스로가 성서 문자주의에 대해 확실하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죽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자주의는 그리스도교를 표면적으로 괴롭히는 가벼운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이 점차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많은 문자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이 책을 통해 수행하려는 일을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성서를 문자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 외에는 성서를 읽는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의 모든 교리”를 버렸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그런 비난을 여러 번 들었다. 심각하게 왜곡된 이런 관점은, 이 책이 얼마나 그리스도교적인지 볼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결국 이것이 나의 딜레마이다. 나는 성서와 성서 연구가 내 삶과 믿음의 깊은 원천임을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또한 성서가 수세기 동안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일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성서에 대한 이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취할 수는 없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살기 위해 성서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성서를 붙잡기 위해 현대사회를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며, 앞으로 할 선택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이 축복받은 시대에 감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성서를 읽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성서의 단어들이 하느님의 입을 통해 말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