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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철학
· ISBN : 9788997581184
· 쪽수 : 279쪽
· 출판일 : 2013-05-06
책 소개
목차
1 자아와 정체성
어떤 ‘내’가 진짜 ‘나’일까?
나는 변화의 중심에서 변화를 만드는 존재다
구두쇠가 어떻게 자선가가 될 수 있었을까?
내 안의 나, 내 밖의 나, 나는 누구인가?
공주병과 왕자병은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까?
2 고통
몸과 마음은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고통은 또 다른 행복을 열어 주는 문이다
고통을 음미하는 초월의 정신
3 운명과 자유
살인자의 운명을 지닌 채 태어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로봇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까?
인간의 운명도 미리 결정된 대로 진행될까?
점성술사는 어떻게 예측의 힘을 얻었을까?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언가들과 델포이 신전의 예언가들은 어떻게 다른가?
절대적인 자유는 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롭다는 생각은 호르몬이 만들어 내는 착각이 아닐까?
인간의 자유는 유전자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일까?
기술은 인간의 자유를 증가시킬 수 있을까?
사물에는 불변하는 본질이 있는 것일까?
모든 욕망이 다 나쁜 것일까?
4 철학과 의심
왜 철학의 생일을 기원전 585년 5월 28일로 볼까?
시장 사람들, 밀레토스인들은 왜 의심이 많았을까?
탈레스는 어떻게 의심 많은 밀레토스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5 의미와 기호
의미와 기호의 차이는 무엇일까?
기호가 바뀌면 의미도 바뀌지 않을까?
책상은 반드시 책상이기만 해야 할까?
놀고 있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소변기는 소변기에 그치는 것일까?
구름은 구름이 아니다
상상력이 여유에서 나온다고?
정신적 여유는 한가한 시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여유는 멈춤의 지혜다
6 객관과 주관
사진은 객관적 증거물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사진이 더 올바른 사진인가?
삶의 균형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7 모순
플라톤은 왜 책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을까?
그럼 왜 플라톤은 그렇게 많은 글을 썼을까?
왜 듣기 싫은 말도 들어야 할까?
왜 TV 속의 이미지를 그대로 믿으면 안 될까?
광고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남들의 판단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어떻게 한 소년의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까?
왜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 안달을 할까?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똑같은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일까?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인 세계일까?
내가 사는 곳의 문화만이 옳은가?
모든 문화를 다 존중해야 하는 것일까?
나와 다른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8 공평
공평이란 무엇인가?
왜 14살이 안 되면 형사 처분을 받지 않을까?
세금을 어떻게 물리는 것이 공평한가?
물에 두 사람이 빠졌다. 누구를 구할 것인가?
폭력적인 성향을 타고났다고 해서 죄가 없을까?
불공평해! 내 정보는 적은데, 왜 네 정보는 많은 거야?
누가 피자를 차지할 것인가?
왜 장애를 가진 친구에게는 특별한 혜택이 주어질까?
왜 공무원 채용에서 여성들을 우대할까?
법률의 개정은 어떤 원리에 따라야 할까?
물음을 달리할 수 있은 능력이 철학적 능력이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도토리가 자신을 부정하면 도토리에서는 작은 싹이 돋는다. 싹은 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싹은 또다시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만약 싹이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싹은 싹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엿장수 이찬형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엿장수로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이렇게 부정과 부정을 거듭하면서 도토리는 우람한 떡갈나무가 된다. 우람한 떡갈나무는 도토리가 자기 부정을 통해서 도달한 결과요 성취다. 이찬형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한 결과가 조계종 초대 종정인 효봉 스님인 것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찬형처럼 치열하게 자신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의 노력이 치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격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나를 치열하게 부정하지 못한 대신 나의 성격에 맞는 것은 무엇일까를 찾는 데 고심했다. 그 결과 책 읽기·글쓰기·달리기가 내 성격에 맞는 것임을 알았다. 이 세 가지를 할 때는 누구에게 간섭받을 일도 없었고, 얼굴이 벌게질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나를 180도 바꾸지는 못했다. 단지 내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았을 뿐이다.
반면, 이찬형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판사 이찬형은 동포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고민했다. 나라를 위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사람들에게 과연 사형 선고를 내린 ‘나’의 행위는 정당한가? 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죽음을 맞아야 하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나’는 판사라는 명예를 누려야 하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 뼈를 깎는 후회의 시간들, 바로 그것이 없었다면 이찬형의 자기 부정, 즉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이찬형에게 있어서 변화는 반성의 결과였다.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 수많은 물음표와 마주하는 시간이 곧 반성의 시간이다. 그 시간의 깊이가 새로운 이찬형을 만들어 가는 변화의 에너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