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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이 밝아오면 2

서녘이 밝아오면 2

밀밭 (지은이)
  |  
뮤즈(Muse)
2016-10-17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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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녘이 밝아오면 2

책 정보

· 제목 : 서녘이 밝아오면 2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04909702
· 쪽수 : 528쪽

책 소개

밀밭 장편소설. 내게도 소중한 사랑이 찾아올까? 여신 '서효'는 다정한 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만, 지난 백오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그녀 곁에는 까칠한 집사 '차언' 뿐이다. 그러던 중 평범한 일상에 연달아 사건이 터지고, 서효는 집사의 눈빛이 차츰 소유욕으로 물드는 것을 느낀다.

목차

8장. 징벌
9장.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
10장. 앙큼한 궁녀는 그분을 쥐락펴락
11장. 내 행복마저 미안함이 되어
12장. 속고 속이는 달달한 연극
13장. 드디어 하나가 되다
14장. 마지막 시험
15장. 너에게 가는 길
16장. 서녘이 밝아올 때까지, 영원히
그 후 1. 총체적으로 문제 있는 시댁
그 후 2. 등을 가볍게 미는 바람처럼
작가 후기

저자소개

밀밭 (지은이)    정보 더보기
좋아하는 것이 많아서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 아무리 힘든 하루를 보내도 밤에 자려고 누우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밤공기를 느끼며 잠깐 휴대폰 들여다볼 때 행복도가 최고조에 이르러요. 출간작으로는 <君子를 사로잡는 법> <사야> <20㎝ 선인장> <클로버 부케> <서녘이 밝아오면> <너라는 이름의 세계> <아름답고 불길한 것>이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어?”
이층 창가에서 지루한 얼굴로 약재를 빻던 서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머루처럼 까만 눈이 커다랗게 일렁였다.
절굿공이가 떼구르르 탁자 위를 굴렀다.
큰길 저편에서 오고 있는 사람은 ‘그 집’의 하인이었다.
황갈색 모자의 양쪽 모서리에 달랑거리는 빨간 수술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잡아당기고픈 모양새였다.
그뿐이랴.
하인은 역시 황갈색 상의에 조끼를 덧입었는데, 조끼에 새겨진 자수는 나비와 벌 모양이었다. 귀여운 아기의 꼬까옷에 놓인 장식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턱수염 난 중년 사내가 입고 다니기엔 다소 위화감이 드는 것이었다.
‘그분’이 데리고 온 하인들은 죄다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어쩔 수 없다. 조금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집집마다의 규율이란 게 있을 터.
혼담이 오고가는 집 하인의 복식을 트집 잡으면 곤란하다.
서효는 얌전치 못한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꺄! 왔어, 왔어! 답장이 왔어!”
이번엔 제발 다정한 답이기를. 그녀가 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를.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봉투를 내미는 하인은 뜻을 읽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서신을 건넨 뒤 역시 정중한 태도로 돌아갔다.
심호흡을 한 번 후, 하고 봉투를 열었다.
서신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서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서효 낭자, 당신은 좋은 분입니다…… 어쩌고저쩌고…… 아무래도 제겐 과분한…… 구시렁구시렁…… 모쪼록 아름다운 인연을 만나시길.
“이럴 수가.”
그녀의 손에서 서신이 떨어졌다. 하얗고 검은 종이가 팔랑팔랑 흙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좋은 분, 좋은 분. 망할 좋은 분.
사내들은 결코 ‘좋은 분’과 혼인하지 않는다. ‘좋은 분’은 혼담을 거절하는 데에 있어 마땅히 둘러댈 변명이 없고, 그렇다고 상대 욕을 할 수도 없을 때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말이었다.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제발 이유라도 솔직하게 알려달라고픈 싶은 심정이었다.
아, 이게 매달리는 건가?
그놈의 좋은 분.
하도 들어서 이젠 뭐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쩜 다들 하나같이 거절 문구도 똑같은지.
서효는 마당 한 구석의 돌로 조각한 의자에 앉아 망연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고추잠자리가 그녀 앞을 춤추듯 지나갔다.
“……망했어어어.”
구슬픈 목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끝났어. 난 틀렸어. 으아아.”
한낱 미물인 고추잠자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남자에게 이토록 많이 거절당한 여신(女神)은 천상, 인간계, 저승을 탈탈 털어도 서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불명예도 이런 불명예가 없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적당히 해두시죠.”
울적함에 빠진 서효의 뒤로 익숙한 중저음이 들렸다.
어깨에 모란 수가 놓인 포를 입은 집사 차언이 산더미만 한 빨랫감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빨래들은 눈부시게 새하얬다.
분명 서효가 맡아 할 때와 같은 빨래판에 같은 비누, 같은 방망이를 쓸 텐데 어째서 결과물은 이토록 다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효가 절대 집안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언의 실력과 비교하면.
글쎄다.
뭐,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는 거니깐.
“차언, 또 같은 소리야. 좋은 인연 만나시래.”
그는 이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옷가지와 수건이 주름 하나 없이 정갈하게 널렸다.
“이번엔 정말 분위기가 괜찮았단 말이야……. 모르겠어. 뭐가 문젤까? 너무 거리낌 없이 대했나? 너무 큰 소리로 웃었나? 너무 혼인에 목매단 여자처럼 보였을라나?”
서효가 작은 면경에 얼굴을 비췄다. 손바닥만 한 면경에 오밀조밀한 얼굴이 다 들어갔다.
화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이래봬도 귀엽다는 소리는 제법 들었다.
먼젓번의 사내에게선 ‘작고 어여쁜 흰나비 같다’는 칭찬까지 들은 몸이다.
으음, 차언에게 뻐기듯이 말해줬더니 ‘그거 배추벌레라고 욕한 거 아니냐’는 말이 돌아왔지만.
서효의 눈꼬리가 풀죽은 강아지처럼 촉, 처졌다.
“나 별론가 봐.”
배추벌레, 배추벌레.
배추벌레는 나중에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기라도 하지.
별다른 이유도 모른 채 정혼을 거절당하기나 하는 자신에게 희망은 있을까.
지루한 표정으로 빨래를 널던 차언이 그제야 제 주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덤덤한 나머지 살짝 무례하게까지 보이는 눈으로 서효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느리게 훑었다.
“확실히, 미인이라고 하긴 좀 그렇죠.”
낮게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랄한 평을 쏟아냈다.
“눈이 큽니다, 일단. 너무 커요. 마주 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니까요.”
크면 컸지, 마주 보기 부담스럽다는 건 또 뭔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서효 눈이 무슨 왕방울만 하다고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그냥 크고 또렷하다 정도에서 그치면 안 되나. 조용히 투덜대는 서효였다.
거기서 끝나나 싶었는데 혹평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바람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몸매도 문제고요. 도대체가 영양식을 해다 먹이는 보람이 없습니다.”
차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심각하게 한탄할 것까지야. 서효는 왠지 억울한 심정이 되어 자신의 어깨와 팔뚝, 허리를 만져보았다.
모두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담아담, 보들보들, 나긋나긋.
죄다 성숙한 아가씨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서효의 눈이 허공에서 다소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승부처를 쥐어짜냈다.
에이, 차언이 제대로 못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딴 건 그렇다 쳐도 내가 어머니를 닮아서 가슴은…….
서효의 손이 말캉한 가슴에 닿았다. 굴곡 확인, 촉감 확인, 크기까지…… 확인?
“음.”
“아무리 제가 집사라지만 엄연히 사내인데.”
“괜찮은 것 같은데.”
서효는 아직 혼자만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괜찮은 거…… 아닌가?”
“대낮부터 실연당하고 가슴 만지는 모습이 참 괜찮아 보이네요.”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말에 쐐기가 박혀 있었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주인 아가씨의 머리에 얼음물을 들이붓는 식.
서효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괘씸한 집사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사가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 흉을 보네.
서효의 볼이 부루퉁해졌다.
“올해 들어 벌써 셋이나 반려를 만났다잖아.”
흰 매화나무로 유명한 백화약방에 청첩장이 세 번이나 날아들었다.
제일 화사한 봉투는 축제의 여신 것으로, 붉은 바탕에 수십 송이의 꽃을 금박으로 새겨 봉투만 보고 있어도 밤새 터지는 폭죽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먼 길이라 참석은 못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흘 내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즐거웠겠지. 축제 여신의 혼사인데 어련할까.
혼례야말로 인생에 있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잔치다. 놀 기회라고 하면 사흘밤낮을 멀다 않고 달려가는 여신 아희가, 자신의 혼례라는 크나큰 놀이판을 마다할 리 없었다.
후회 없이 기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서효가 턱을 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가을 하늘만은 무심하게도 맑았다.
“차언.”
“예.”
“벌써 가을인데, 나 올해 안에는 시집갈 수 있을까?”
“……백오십 년 하고도 열아흐레 쨉니다. 이쯤 되면 슬슬 포기하시는 게.”
가차 없는 말투.
서효는 기품과는 동떨어진 소리를 내며 풀썩 엎어졌다.
남들은 잘도 만나는 짝을, 자신을 대관절 무슨 잘못을 해서 여태 못 만나고 있단 말인가.
서효의 목은 길어지다 못해 이제는 간당간당 떨어질 판이었다.
하늘이 점지한 반려.
대체 누구신가요?
얼굴만, 아니, 옷깃 한 번이라도 좋으니 스쳐 지나가기라도 해주세요.
이쯤 되니까 솔직히 하늘을 쳐다보며 대놓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기요, 천제님! 그 사람 태어나긴 한 거 맞죠?
“하던 일이나 마저 하시죠.”
그러나 돌아온 것은 차언의 매정한 타박뿐. 언제 들고 왔는지 그녀가 이층에 두고 온 절구를 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원망을 품은 서효의 입술이 댓 발이나 나왔다. 괜히 미움의 화살이 차언을 향했다.
지난 번 사내도, 지지난 번 사내도 서효와 단둘이 있을 때는 분위기가 좋다가 차언을 보면 흠칫했다.
눈을 제대로 못 마주치는가 하면, 찻잔이 달그락달그락 떨릴 만큼 손을 떨기도 했다.
“왜 그러세요? 몸이 안 좋으세요?”
갑작스런 변화에 서효가 걱정하며 물으면 다들 짜기라도 한 듯이 억지미소를 지었다.
사실 차언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몇 번의 혼담이 실패로 끝나고서야 깨닫게 된 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사내들이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거다.
이러다 삼백 년 뒤에도 차언이 시키는 일이나 하면서 사는 건 아니겠지?
그때까지 혼인도 못 한 채로?
“안 돼애애…….”
서효의 머릿속만큼이나 새하얀 빨랫감들이 바람에 하늘하늘 날렸다. 그 앞에 서 있는 차언은 향후 천 년은 거뜬할 모습으로 서효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긴 혼인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서효는 빻고, 빻고, 혼신의 힘을 다해 또 빻았다.
눈물이 찔끔 나온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


세상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신들이 있다.
하늘의 천제, 저승의 대왕, 사해의 용왕이야 다들 알겠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신기할 만큼 그 종류가 다양한 것이다.
이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이 깃드나,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여서 신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도 돈다고 한다.
‘신발의 신(神)도 있는데 도대체 어떤 신이 없겠나.’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약방 주인 아가씨인 서효는 그중에서도 ‘잃어버린 것’을 담당하는 여신이었다.
약방의 한쪽 벽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약재함 속에는 그녀가 잠시 맡아두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미처 닫지 못한 싸리문 사이로 나간 새끼고양이.
졸음을 참고 겨우 완성했으나 길바닥에 흘려버린 서당 숙제.
옛집에 두고 온 낡은 인형부터 소중하지만 슬픈 기억까지도.
모두 그녀의 손님이었다.
다행히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들도 있었고, 수십 년 그대로 서랍 한구석에서 쓸쓸히 잊히다가 주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있었다.
주인의 생사와 상관없이 저 스스로의 숨이 다하여 끝나는 것도 많았다.
바닥과 가까운 두 번째 서랍 안에서 곤히 자던 새끼고양이가 바로 그러했다.
아직 주먹보다 조금 더 큰 녀석이지만 돌려보내라는 소식이 서효에게 날아들었다. 어미의 보살핌이 필요한 시기에 거리로 떨어졌으니 살아남기 힘든 것일 터.
작은 육신은 골목 어딘가에서 느리지만 사늘하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서효는 약재함을 열어 졸린 눈을 한 녀석의 영을 꺼냈다.
“나비야, 집에 가자.”
애옹.
아직 잠이 덜 깨 가물가물한 눈으로 새끼고양이가 잠투정을 부렸다.
서효는 녀석을 안아주고 가르랑거릴 때까지 턱 밑을 긁어주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진 쯤에야 서효는 허공에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이계와 이어지는 검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서워할 것 없어. 쭉 가면 돼.”
새끼고양이의 털이 바짝 섰다.
끝 모르게 이어진 어두운 통로에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서효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녀석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더는 춥고 배고프지 않을 거야. 너도 구름 위를 걷는 걸 좋아하게 될 거야.”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경계심이 다소 줄어들었다. 그러나 녀석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서효는 쓴웃음을 지은 뒤 통로를 향해 날갯짓처럼 손을 저었다.
그러자 칠흑처럼 어둡던 길은 순식간에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덧씌워졌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새끼고양이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황홀하고, 신기하다. 뭔가 좋은 냄새도 나는 것 같다. 하지만…….
녀석이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울었다.
정말 가도 되냐고 묻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서 가보렴.”
그녀의 말을 끝으로 녀석은 용기를 냈다.
처음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지, 걸을수록 신이 나는 듯 보였다.
무지개 위를 구르고 달리는 녀석의 뒤로 강아지 몇 마리와 늙은 고양이가 따랐다.
서효는 작은 것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통로의 문을 닫았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저릿하고 쓰린 가슴께를 꾹 누른 채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서랍 몇 개가 비었다. 빈 공간은 서효가 들여다보기 무섭게 다른 존재로 채워졌다.
“이런, 연서를 잃어버리면 쓰나.”
일부러 혀를 크게 차며 허한 마음을 달래보려 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질 일은 아니다.
그나저나 연서라니 달달하네. 사람들은 어떤 말을 정인에게 보내는지 좀 볼까.
남의 서신을 몰래 읽는 거라 양심이 살짝 찔리지만 호기심은 어쩔 수가 없다.
혹시 누가 아나. 약속시간 같은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을지.
“인연의 신이 따로 있는 건 아실 테고.”
정인의 입술을 붉은 동백꽃에 비유하는 대목까지 읽었는데, 차츰 도취되는 감상을 깨뜨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한적한 약방에 또 누가 따로 있겠나.
여지없이 차언이었다.
“내일 현감 댁에서 달포 치 약을 타러 올 겁니다. 그때 돼서 우는 소리 마시고 미리 해두세요.”
서효의 눈이 세상에서 제일 얄미운 인간을 향했다.
동네 아가씨들의 마음을 모조리 차지하는 외모면 뭐하나. 시원하게 틘 눈매에선 무심함이 뚝뚝 떨어지고, 빈말로라도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차언이 이상하리만치 따스했던 날도 있는 것 같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한 백오십 년 전쯤?
눈가를 살짝 덮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가 서효를 채근했다.
단정한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은 혼인에 목매단 주인 아가씨의 가슴을 술렁이게 할 법도 하다.
입만 안 열면 말이지.
“아무리 신이라도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는 이상 먹어야 합니다.”
저놈의 잔소리.
“밥을 먹으려면 쌀을 살 돈이 필요하죠.”
“네, 네, 제가 잘못했네요.”
“그런 말투는 좋지 않습니다.”
도대체 천제님은 하고 많은 시종 중에 왜 저런 사내를 곁으로 보내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궁합이 맞지 않았다.
태평하고 낙천적인 그녀는 차언만 아니라면 해가 중천에 걸리도록 침상에서 일어나질 않을 터였다.
허리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일어나서는 낚싯대를 챙겨 들에 나갈 것이다.
물고기가 잡히면 좋고, 안 잡혀도 그만이다.
배고프면 숲에 들어가 산열매랑 과실을 따먹으면 되니까.
정 안 되면 약재를 이웃집의 쌀과 맞바꿀 수도 있다.
늴리리야 니나노.
그러다 약재가 똑 떨어지는 날 아가씨는 굶어 죽을 거라고, 집사는 싸늘하게 폭언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걸 차언의 입에서 듣고 싶진 않았다.
“점심을 확 그냥 수정교자 먹자고 할까 보다.”
수정처럼 투명한 만두피에 신선한 새우와 부추, 다진 돼지고기를 넣어 만드는 요리는 손이 많이 가서 웬만하면 아침, 점심으로는 먹지 않는 요리다.
초가을에 부엌에서 땀 뻘뻘 흘리게 만들어 줄까.
정작 차언에겐 말하지도 않을 심술궂은 생각을 해보는 서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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