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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24052013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25-10-17
책 소개
목차
위대한 문혁 씨 / 7
당신을 기억합니다 / 41
소설 쓰는 인간 / 79
우리의 피크타임 / 105
엄마의 전성시대 / 139
나, 아직 여기 있어요 / 165
사랑의 아우라 / 203
나만의 방 / 215
아버지-시지포스 / 243
왕이 귀환하다 / 267
작품해설 인물의 성격 창조와 소설의 재미_장윤익 / 298
이정은 작품세계 운명적 짝사랑, 소설을 향한 집념_조완석 / 303
책을 내면서
이정은 연보
저자소개
책속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속이 상했던 것들은 물거품처럼 보였다. 창고 관리소장인 문혁은 직접 생산에 관여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지금 하는 일도 생산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문혁은 수재가 실점을 놓은 것을 보고 덤벙댄다고 나무랬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수재를 이긴 것은 수재의 배려였다. 상수上手라는 체면만을 지키려는 데 집착하느라 수재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자신이 옹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쓸데없는 집착, 초조함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문혁에게는 아직도 자신의 기색을 살피는 아내가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 예쁘고 똑똑한 수민도 있다. 그리고 수재를 떠올리자 수재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슴으로 꽉 차올랐다. 자신보다 십 센티미터나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흰 피부에 귀티가 나는 내 아들이었다.
어디다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외모였다.
저녁이 되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 문혁은 저만치 앞서가는 긴 그림자를 보았다. 긴긴 하루는 저녁노을을 만들고 자신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 놓았다. 마치 삶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아파트 주변에 은사시나무 잎이 바람에 하얗게 뒤집히고 있었다. 마치 그를 반기는 카드섹션으로 보였다. 아내가 기다리는 집을 향해 급히 걸었다.
헐떡이며 들어서는 수재와 수민에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누가 쫓아오냐?”
놓쳐버린 시간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혁은 급한 마음에 두 계단을 넘겨 디디며 단숨에 계단을 올라섰다. (「위대한 문혁 씨」)
향수는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공기를 통해 은은한 향이 코끝으로 스며든다. 인혜는 주위를 둘러본다. 향기가 어디서 나는지 보려고 뒤로 돌아보았으나 거울 속에는 자신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먼저 탔던 사람이 남기고 간 향기일 것이다. 매일 아침 출근하던 남편에게서 나던 그 향이다. 혹시 남편의 영혼이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 번 더 둘러본다. 역시 그녀 혼자다. 숨을 들이쉬자 익숙한 라벤더 향이 다시 그녀 코를 향해 날아든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침마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어깨 위로 남기고 가던 향기였다. (「당신을 기억합니다」)
소설은 작가의 체험과 여정을 자양분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작가에게 고통과 시련은 위대한 자산이다. 아픔과 굴욕의 시간들이 숨어 있다. 그 숨은 역사를 끄집어내지 않고 어떻게 글이 될까. 지나온 삶 속의 고통이 글의 소재가 되고 글을 쓰게 만들었으니 어쩌겠는가. 오죽하면 “지혜로운 한 인간이 사라지면 박물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을까. 공감되는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하늘을 찌르는데 더 발전하기는 어려우니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워드프로세서 앞에 앉아 목 놓아 울었다. 스토리는 많은데 이것을 어쩌지? 네가 결혼을 일찍 하지 않고 조금만 더 공부를 했다면 문장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때부터 너는 공부하러 다니는데 열중했다. 하지만 성과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꽤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는데 읽어보면 조악하다. 문장 때문에 작가 자신의 품위까지 떨어뜨린다면 말이 안 된다. 애초에 글쓰기의 원천은 고통을 이기는 과정을 더 크게, 더 세밀하게 다루기 위한 발상이다.
친구 딸은 엄마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노출시키는 그런 이야기를 원치 않고, 그런 엄마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워 한다고 했다. 굳이 별 볼일 없는 일상사를 일기체로 쓰는 걸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천하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동네 미장원에서 여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겪은 일을 세상에 내놓으므로 나와 공감하는 독자를 원한다. (「우리들의 피크타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