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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0015477
· 쪽수 : 500쪽
· 출판일 : 2017-03-15
책 소개
목차
2.
3.
4.
5.
6.
7.
8.
9.
에필로그 1.
에필로그 2.
외전 1.
외전 2-1.
외전 2-2.
외전 2-3.
외전 2-4.
외전 2-5.
외전 2-6.
작가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는 지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윤은 문득 생각했다.
이 여자를 새로운 섹스 파트너로 삼으면 어떨까.
처음에는 스스로도 좀 당황했지만 곱씹어볼수록 괜찮은 생각 같았다. 외모나 몸매는 자신의 기준에서 한참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도 있고, 의외로 섹스 쪽으로도 잘 맞는 것 같고. 무엇보다 나중에 귀찮게 할 만한 타입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나나조차도 이 정도까지 쿨하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으니 안심이다. 그 점이 재미있기도 하고. 지금껏 오빠, 오빠 하면서 이것 사달라, 저것 사달라 하고 조르는 여자들만 만나온 윤에게는, 하다못해 같이 칵테일 한 잔을 마셔도 먼저 지갑을 꺼내려 드는 지수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왠지 재미있는 관계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윤은 지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지수 씨.”
가쁜 숨을 고르고 있던 지수가 그제야 반쯤 눈을 뜨고는 윤을 쳐다보았다. 윤은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사귈까?”
섹스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표현을 썼다. 생각대로 지수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수 씨는 내가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사귀자. 나, 지수 씨가 진심으로 좋아졌어.”
달콤한 말은 윤의 전문 분야다. 그는 지수의 손을 끌어다가 제 벗은 가슴에 갖다 대며 호소하듯 말했다.
“지수 씨 말이 맞아. 솔직히 지난번에는 하룻밤뿐이라는 생각도 있었어.”
당황한 듯한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윤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후로 계속 지수 씨가 생각났어. 자꾸만 얼굴이 떠올라서 스스로도 무서울 정도였단 말이야. 아마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으면 내가 먼저 연락했을 거야.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윤은 지수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우린 운명인가 봐.”
우욱.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기분이었지만 윤은 간절한 표정을 애써 유지했다. 이 정도로 순진한 여자를 섹스 파트너로 만들려면 과도한 멘트 정도는 불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해, 지수 씨. 첫눈에 반했단 말이야.”
지수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칼에 입 맞추며 윤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지금까지 여러 여자를 만났지만, 누구한테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어. 진심이야.”
윤의 품 안에서 지수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절한 고백이 몇 번이나 되풀이된 후에야 그녀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최대한으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마워, 지수 씨! 정말 잘 해줄게. 믿어줘.”
다시금 지수를 반듯이 눕히고 작은 분홍빛 유두를 입 안에 품으며 윤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 당분간 섹스할 상대가 궁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날의 섹스가 지나치게 만족스러웠기 때문일까. 그 후로 한동안 윤은 잡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우 지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은, 사귀기로 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먼저 사귀자고 한 주제에 일주일 동안이나 연락도 한번 하지 않았던 게 약간 뒤가 켕겼다. 하지만 지수 쪽에서도 연락이 없었던 걸 보면 어차피 그쪽도 바빴으려니, 하고 윤은 저 편할 대로 생각해버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괜찮으면 만나고 싶은데.]
일주일 내내 연락이 없었던 것치고는 놀랍게도 빠른 속도로 답장이 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괜찮아. 어디서 만날까?]
간결하면서도 흔쾌한 대답에 윤은 메시지를 들여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하루 이틀만 연락이 없어도 웬일로 연락을 다 했냐는 둥, 죽은 줄 알았다는 둥, 하고 대번에 비꼬았을 텐데. 역시나 이 여자는 이런 쪽으로 특별하다.
[우리 처음 만났던 영화관 앞 어때?]
약속장소를 어디로 정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보냈다. 자신의 회사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길에서 직장 상사를 마주쳤던 걸 보면 그녀의 회사에서도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번에 이용했던 싸구려 호텔과도 가깝다.
[퇴근하고 7시까지 그쪽으로 갈게.]
역시 간결한 메시지가 돌아왔다.
[이따가 만나.]
마지막으로 그렇게 써서 보내려다가, 윤은 문득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뒤에 빨간색 하트를 찾아 넣었다. 서른두 살의 회사 사장인 지윤이 아니라, 데이트 서비스를 하는 스물일곱의 김지윤이라면 이 정도 표현이 딱 어울리지 않을까.
[이따가 만나♥]
전송 버튼을 누르고, 윤은 피식 웃었다. 저 아무 의미 없는 하트를 보고 수줍어할 여자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재미있었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윤은 영화관 앞으로 갔다. 내친김에 처음 만났던 날, 지수가 앉아 있던 바로 그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안 있어 지수가 나타났다.
“어, 벌써 와 있었어?”
반갑게 말을 거는 지수의 모습을 보고 윤은 하마터면 입 밖에 내서 한숨을 쉬어버릴 뻔했다. 수수한 H라인 스커트에 엷은 베이지색의 블라우스. 좀 지나치게 회사용 차림이라는 티가 나긴 했지만 뭐 거기까진 봐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블라우스 위에 걸친 긴팔 카디건이었다. 이 푹푹 찌는 날씨에!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그녀는 긴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처음에 만났을 때도 긴소매를 입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도 이미 초여름이었는데.
“덥지도 않아?”
그렇게 묻는 윤의 목소리에는 조금 짜증이 묻어 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옷차림을 한 여자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남 보기 부끄러웠다.
“아, 이거?”
평소에 많이 듣는 질문인 듯, 지수는 금세 자신이 입고 있는 긴소매를 내려다보았다.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래.”
알레르기라는데 뭐라고 더 말할 수도 없어서 윤은 그저 속으로 한숨을 삭였다. 그래, 뭐 데이트를 할 것도 아니고, 호텔까지만 참으면 되겠지. 여자의 옷 따위야 어차피 벗겨버리기 위해 있는 거 아닌가.
원래는 근처에서 함께 저녁식사라도 하고 호텔로 갈 예정이었는데, 식사는 패스해야겠다고 윤은 생각했다. 도저히 이렇게 촌스러운 여자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차라리 일단 호텔로 가서 룸서비스를 부탁하는 게 낫겠다. 싸구려 호텔이라도 간단한 식사 정도는 있겠지.
마음을 결정한 윤은 얼른 표정을 바꾸어 웃어 보였다.
“많이 덥다, 그치? 우리 얼른 시원한 데 들어가서 좀 쉬자.”
물론 호텔로 가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디건 주머니에서 영화 티켓을 꺼내어 내밀었다.
“내가 좀 일찍 도착해서, 미리 표 사놨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응?”
당황한 윤에게 지수가 설명했다.
“볼 만한 게 이것밖에 없었어. 미리 예매를 안 했더니 다른 영화들은 다 앞줄밖에 안 남았더라고. 아니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고.”
아차, 싶었다. 영화관 앞에서 만나자고 한 건 단순히 약속장소를 얘기한 거였지 영화를 보자는 뜻이 아니었는데.
윤은 잠시 망설였다. 착각을 어떻게 정정해줘야 할까. 그로서는 이 여자와 데이트를 할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었다. 애초에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생각한 것도 아주 크게 양보한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나마 ‘사귀는’ 사이니까, 나나처럼 다짜고짜 호텔로 불러내기가 뭣해서.
그런 마당에 하물며 영화라니, 그건 진짜 데이트가 아닌가. 언제 마지막으로 데이트를 해봤는지 기억도 안 났다. 대학교 때였던가?
여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남자에게 있어 어차피 모든 데이트의 최종 목적이자 종착점은 섹스다. 그런데 왜 영화니 놀이동산이니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하는지 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침대로 직행하면 될 것을.
다른 여자들은 물론, 그나마 오래 만난 나나와도 마찬가지였다. 호텔로 가기 전에 기껏해야 바에서 술이나 한잔 먹으면 모를까, 그 외에는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앗, 영화 시작하겠다. 얼른 들어가자, 지윤 씨.”
갑자기 지수가 시계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봐, 목적지는 영화관이 아니야. 호텔이라고!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윤은 어느새 지수에게 이끌려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