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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36563781
· 쪽수 : 528쪽
· 출판일 : 2021-09-10
목차
프롤로그 친구는 남자가 되다
1. 한 번 더 해볼까?
2. 남자를 보다, 여자를 느끼다
3. 고백과 배신
4. 버리기 위한 관계
5. 내 인생에서 제발 꺼져
6. 조건부 만남
7. 질투의 대상
8. 사랑해
9. 친구와 연인 사이의 유치에 관해
10. 내가 너에게 반했던 순간
11. 아프면 사랑이다
외전 야망과 욕망 사이의 꽃
작가 후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오늘 남사친과 절교할 것이다.
아니,
나는 오늘 내가 13년 동안 짝사랑했던 남사친과 절교할 것이다.
아니,
이제 1분 후면, 서른이 되는 나 ‘정우진’은 오늘 내 앞에 있는 13년 지기 ‘전사란’에 대한 외사랑을 끝내고, 절교할 것이다.
시끌벅적한 수제맥주 집
1차로 소주와 곱창을 끝내고, 2차로 생맥주를 시작한 두 남녀는 이미 거나한 취기에 올라 있었다.
데에에엥. 데에에엥. 대형 프로젝트 빔 화면에서 구슬픈 종각의 종소리가 그녀의 서른을 축하했다. 종소리는 마치, 서르으은― 서르으은― 하고, 나이 먹는 서글픔을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직이 입술로 축하했다.
“빌어먹을…….”
서른이다. 드디어 서른까지 와버렸다. 눈앞의 남사친을 혼자 마음에 품고 서른까지 와버린 것이다. 향기로운 10대, 20대의 청춘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이놈만 홀로 끙끙 앓다가 연소시켜 버린 것이다. 30대마저 이 녀석을 가슴에 품고 장렬히 태워 버릴 수는 없었다.
술을 연거푸 들이켰던 우진. 마주 앉은 남사친 전사란에 대한 결심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왜냐하면, 친구 전사란은 너무 예뻤다. 말끔하니 사람 홀리게 생겨선. 13년 전, 고딩 1학년 때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홀렸다. 그런데,
“정우진. 해볼래? 소개팅.”
1차 소주잔을 들 때부터,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소리를 꺼내고 있었다.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과의 절교를. 이놈을 끊지 못하면 영원히 이놈을 홀로 가슴에 품고 앓을 것만 같았다. 13년. 지겹게 너에게 붙어 있었다. 끝낼 때가 된 것이다. 심지어 소개팅이라니. 소개팅을 권유하다니. 짝사랑 상대에게 가장 가혹한 증빙이 아닌가. ‘난 너에게 1도 마음 없음’을 알리는 증빙.
“왜 대답 안 해?”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또 얼마 못 갈 거잖아?”
네 덕분에. 덕분에 남자를 만나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주 먼 옛날 ‘2년’을 질질 끌고 늘였던 연애가 가장 장기간이었고. 썸도, 연애도 두 달을 넘기지 못해 좌절했었다. 네 덕분에. 널 향한 마음을 버리지 못해서.
“응. 그럴 거야.”
이제, 버릴 거야.
“그러니까 한 번 얼굴만 봐. 음악감독이야.”
자꾸 심장 저리게, 다른 남자 얼굴을 보래. 내 눈은 네 얼굴을 따라가는데.
짙은 눈썹 아래 사람 속을 꿰뚫어 볼 것처럼 형형한 눈은 매끄럽게 꼬리가 올라가 시원시원하다. 무엇보다 얼굴 중심에 우뚝 선 코가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살이 붉게 차오른 아랫입술이 섹시함을 부가한다면, 갸름하면서도 선 굵은 턱이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모델 포스 풍기는 큰 키와 널찍한 직각 어깨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게 한다.
한마디로, 이놈은 잘났다. 고딩 1학년 때부터 성숙한 남자의 멋이 있었다. 너무 잘나신 놈이라 전교 모든 여학생이 다가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대체로 넘볼 수 없어 다가가지 못하거나, 와중에 욕심내며 다가가는 애들은 여자 냄새를 폴폴 풍겼다. 콧대 높은 이놈은 어설프게 여자 냄새 풍기며 다가오는 애들을 솜씨 좋게 개무시했지. 그녀들이 개무시 당하는 줄도 모르게. 젠틀하고 매너 있고 상냥한, 위선의 솜씨로.
한눈에 이놈에게 꽂혔던 그녀는 개무시 당하는 애들과 다른 작전을 펼쳤다. 여리여리하고 가냘픈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털털한 매력으로 ‘우진 형’이라 통했던 그녀. ‘친구’라는 직위로 승부했다. 동성친구라 착각할 만큼 거리낌 없는 남성다움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야, 너 욱이 친구라며?”
가녀린 손가락으로 벅벅 목을 긁으며 말을 붙였다. 친해진 후로는 이 녀석의 목에 정성껏 헤드락도 걸어주었다.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막역한. 13년 동안, 녀석이 만난 여자들과의 시시콜콜 연애사까지 집필할 수 있을 만큼 ‘막역한’ 여사친.
“너랑 ‘파라다이스’ 영화 작업했던 김영주 감독 아냐?”
사란이 그녀에게 소개하려고 하는 음악감독은 그가 함께 작업했던 인간일 것이다.
전사란은 유능한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이놈이 영화감독이 되기까지의 역사는 위대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 위대한 전기를 읊으라면 읊을 수도 있다.
위인 전사란은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 이과, 예체능에 골고루 능해 성적이 좋았으며, ‘영화감독’이라는 꿈도 확실하게 갖고 있으시었다. 대학 때는 단편 영화 몇 편을 만들어 세계 유수 영화제에 출품해 두각을 드러내시었다. 군 제대 후에는 엄격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퇴서를 집어던지시더니, 장편 독립영화를 만들어 감독 입봉까지 하시었다. 심지어, 그 입봉작은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올라 주목까지 받으며 신예 천재감독 반열에 오르시었다. 얼마 전 개봉한 두 번째 장편 상업영화는 1,000만 관객을 모았고, 대중성까지 겸비한 ‘영 앤 리치 핸썸’ 영화감독의 주인공이 되시었다. 어머니가 대형 로펌의 주인이라는 건 안 비밀로 하겠다.
“어. 한 번 스치면서 봤지? 너 괜찮다더라.”
그래. 한 번 스쳤던 그날,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찮더라니.
“그분…… 나, 남성편력 있는 건 알려나?”
“크큭. 남성편력은 무슨, 순진한 게. 순진해서 오래 못 만나는 걸 남성편력으로 포장해?”
“순진? 허. 나 고딩 때 너네 사내놈들과 함께 야동까지 포섭했어.”
전사란 패거리 사내들과도 막역했던 그녀. 돌려보는 야동까지 합세해 습득했다.
“목까지 빨개져서 딸꾹질했던 건 기억 안 나?”
물론 처음에 그걸 입수한 한 녀석의 폰을 빼앗아 확인했을 때, 첫 성교육의 당혹감에 빨개지기도 했었지만. 이후로는 적극적으로 성교육의 유익함을 함께 누렸다. 오히려 전사란이 시답잖은 야동이라고 비하하며 시시해했었지.
“야, 전사란. 내가 대딩 때는 너네들 여자들과의 섹스 상담까지 진지하게 경청했거든? 내가 지용이 발기부전까지 카운슬링했던 거, 그건 기억 안 나?”
이 녀석 패거리들과의 술자리에서 발기부전을 고백한 지용에게, 그녀는 진지한 조언까지 했었다. SM에 도전해 보라고.
“그래서, 남자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냐? 너도… 제대로 된 연애 좀 해봐.”
연애를 하라고? 환상이 없냐고? 연애에 대한 환상…… 그것은 항상 너에게 품었었지. 잘나기만 한 너와 손깍지 끼우고, 아름다운 풍경을 걷고, 입술을 맞추고, 깊은 밤 아주 찐한 사랑을 나누고, 너의 몸을 격렬히 느끼는…… 환상까지.
그녀는 맥주 한 잔을 다시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캬아∼ 마셔. 마시고 죽자.”
녀석과의 이별을 작심하기 위해 쭉쭉 몸속에 알코올을 주입했다. 그녀가 술을 삼키는지 술이 그녈 삼키는지 모를 시점까지. 흐려지는 그녀의 시야 속에서 녀석의 예쁜 얼굴이 흐물흐물 지워져 갔다. 사라져 갔다. 순간, 억울했다. 13년의 사랑과 우정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니. 이렇게 마음먹고 나 홀로 ‘절교’하면, 그냥 끝나는 거야? 허무하게?
녀석과 비틀거리며 술집을 벗어났다. 오늘 오후까지 내린 눈이 바닥을 하얗게 쌓았다. 회색 코트와 베이지 목도리에 작은 코를 묻은 그녀. 검은색 코트 깃을 여미는 전사란을 응시한다. 전사란도 오늘은 과하게 마신 듯, 평소답지 않게 발걸음이 무뎠다. 그녀의 이성적 회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서른…… 서른인데. 이처럼 공허하게 막을 내리면, 억울하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호텔 moon’ 간판이 반짝거렸다. 호텔이라고 이름했지만, 고급 모텔 정도의 수준일 것이다. 그녀는 술기운에 풀린 혀로, 남자들이 여자를 꼬시는 전형적인 언어를 소리 냈다.
“야… 우뤼 쪼―기서 좀 누웠다 가좌. 도줘히 못 걷겠당…….”
이 녀석의 60평대 고급 아파트나 호텔, 리조트에서, 술에 취한 패거리들과 함께 취침을 하기도 했었다. 그녀 홀로 사란의 집 게스트룸에서 수면을 한 적도 많았다. 한데, 우리 단 두 사람만이 ‘호텔’이라 부르는 ‘모텔’에서 취침한 기억은 없다. 지용의 원룸에 둘이 남아 침대와 바닥을 하나씩 차지하고 하룻밤을 보낸 추억 하나가 있을 뿐.
남자의 눈이 느릿느릿하게 깜빡였다. 헉? 이 녀석의 주량은 그때그때 달라서 알기 어려웠는데. 주사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졸음.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 곧 졸기 시작한다.
“헙. 야……!”
그녀는 남자의 한 팔을 잡아 어깨에 걸었다. 졸다가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묵직한 팔의 무게가 그녀의 여린 어깨를 짓누른다. 전사란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저미고. 두근. 두근. 심장박동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릴 혼잣말처럼 건넸다.
“그럼… 간다… 저기…….”
저기 반짝이는 호텔 moon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