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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6345619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23-10-20
책 소개
목차
펴내는 글 | 순천의 색깔을 담다 6
[특별 초대석] 다시 찾은 순천 민 혜 10
[시]
우화각 기둥 외 4편_강민 18
순천만에서 외 2편_김광현 26
갈밭에서 불꽃놀이를 하다 외 9편_김영숙 33
고추잠자리 외 4편_김행심 52
귀향 외 1편_김현숙 60
눈썹바위 외 5편_남기원 64
낮 동안의 일 외 4편_남길순 78
와온 해변에서 외 4편_박미경 90
옴팡골 외 5편_박광영 104
골단감·1 외 4편_서정옥 116
가뭄 외 2편_안천덕 123
순천만, 생명의 끈을 풀어가며 외 6편_장윤호 128
선암사(仙巖寺)에서 외 4편_전종주 138
빈집 외 4편_조병훈 146
도돌이표 외 3편_최서연 156
상사호 망향정에서 외 1편_허승 161
[동시]
아부지 외 7편_박한송 169
[수필]
진남재를 넘어서 외 1편_고성현 184
유배가사의 효시 만분가 외 3편_김광현 197
선암사 가는 길 _박광영 213
숨겨진 순천의 보물, 이곳 외 2편_이승훈 233
템플스테이 _이정희 252
고향 하늘 _정영철 260
저자소개
책속에서
3초 / 김영숙
그래
조금만 참아봐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떠봐
해 질 녘 순천만에서
하염없이 눈길만 받던 저 찌가
물 밑으로 잠수한 지금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던
흑두루미 한 마리가
갯지렁이를 낚아채
비상하는 그 순간
피어 있던 갈대 꽃잎이
파르르 떨리고
바람의 품에 안겨 있던
붉은 노을이
발갛게 물든 뻘밭에
살포시 몸을 누이는 지금
우리가 눈을 마주친 것도
너를 바라보던 내 눈에
강력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도
그해, 내게는 되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녹록지 않았다. 학교를 중퇴하고 스물셋의 나이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좌충우돌이었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소변을 보고 있는데, 사장이 들어오더니 그 옆에 섰다. 나는 사장을 흘끗 한번 쳐다보고는 담배를 그대로 물고 피우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하고 인사를 하는데 사장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차 싶었지만, 담배를 입에서 뺄 수도 없고, 소변을 멈출 수도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진서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사장님 옆에서 젊은 놈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인사도 안 하더라는,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녀석이라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행동을 따져보면 뭐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마음과 달리 일찍 시작한 직장생활에서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하루하루 보내는 일상이 자신의 꿈이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고,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첫 직장이 평생의 직장이 될 수도 있지만, 앞날이 뻔히 보이는 회사 생활에 몇 개월이 못 되어 싫증을 내고 있었던 터였다.
이리저리 궁리해 보아도 뾰족한 탈출구는 없었고, 하숙비를 치르고 집에 돈을 보내고 나면 책 한 권 사는 것도 여러 번 고민해야 할 정도로 초라한 생활이었다. 그해 가을에 시작한 직장생활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배낭을 둘러메고 갑자기 조계산을 넘어보자고 한 것은 토요일 오후였다. 눈발이 간간이 비치는 날씨에 하숙집 방안에서 박혀있기에는 좀이 쑤신 것이다. 지리산 종주도 두세 번 했겠다, 조계산 같은 경우에는 그냥 캄캄한 밤이라도 찾으면 길이 보일 것이요 그렇게 넘어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뭐 별일 없을 거야, 겨울이고 눈발이 간간이 보이는 날씨이긴 하지만, 지리산을 이미 몇 번이나 종주했던 진서에게는 큰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1번 버스를 타면 조계산 가는 데 선암사에서 내려 송광사로 넘어오면 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말리는 하숙집 선배를 뒤로하고 진서는 젊을 때 객기를 부려봐야지 언제 부리겠냐며 결국 고집을 피우고 순천 역전에서 버스를 탔다.
고향이 아닌 객지에서 지리도 잘 모른 채 버스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겨울이라 어느새 해가 떨어져 점차 어두워져 가는 차창 밖을 보았다. 버스 천정의 희미한 불빛이 반사된 차창에는 진서의 퀭하고 불안한 얼굴이 반사되었고 그 밖으로는 점차 민가의 불빛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기사는 버스를 몰고 갔다. 차 안에 있던 주로 노인네들이 한사람 두 사람 내리더니 어느덧 버스 안에는 기사와 나, 단둘만 남았다.
한참 어둠 속을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운전하던 기사가 백미러를 보더니 조용히 말을 붙여 왔다.
_수필 박광영 ‘선암사 가는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