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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국내 BL
· ISBN : 9791156411536
· 쪽수 : 432쪽
· 출판일 : 2019-07-29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장. 파종
2장. 발아
3장. 생장
4장. 개화
5장. 만개
6장. 절화
7장. 영원한 계절
에필로그
외전 1. 호칭
외전 2. 피아노
외전 3. 증상
외전 4. 부부싸움
외전 5. 결혼기념일
저자소개
책속에서
에단은 그날 정말 힘든 하루를 보냈다.
노예를 관리하는 시종에게 아침부터 뺨을 얻어맞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따져 물을 처지도 아니니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자 시종이 뒤통수에 가래침을 뱉었다. 서둘러 식재료를 옮겨야 해서 씻어 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달려갔는데 주방 시종에게 또 욕을 먹었다.
다른 노예들에게 밉보여 며칠 밥을 굶었더니 기운이 없어 드는 상자마다 손에서 미끄러졌다. 마지막으로 옮긴 게 하필 달걀이어서, 에단은 다시 두들겨 맞았다. 시종이 쓰는 회초리는 등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고, 아직도 화끈거렸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씻다가, 아침부터 머리에 가래침을 달고 다닌 게 떠올랐다. 에단은 묵묵히 찬물을 부어 몸을 닦았다.
“재수 없는 새끼.”
뒤로 익숙한 욕이 따라붙었다.
노예들은 에단을 싫어했다. 볕에 타지 않는 하얀 피부 때문인지, 점잖고 잔잔한 말투 때문인지, 드문 술자리에 얼굴을 비치지 않아서인지, 에단은 이유를 몰랐다. 사실 다른 노예들도 에단이 싫은 이유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일과를 마친 늦은 밤, 에단은 혼자 양동이를 들고 메리블루 정원으로 향했다. 가장자리에는 우뚝하고도 다정한 교목, 해를 바로 받는 중앙에는 메리블루가 가득했다. 명랑한 봄밤, 바람이 꽃대를 흔들고 지나갔다.
메리블루에 물을 주는 날이었다. 본래 메리블루를 관리하는 시종이 따로 있는데, 그는 노예에게 일을 미루기 일쑤였다. 그래도 에단은 이 일이 싫지 않았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뜰, 선선하고 부드러운 봄바람, 좀처럼 가지기 어려운 혼자만의 시간…….
부러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메리블루는 메리골드를 개량하여 만든 꽃인데, 깨끗하고 새파란 꽃잎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에단은 이 꽃을 좋아했다, 의미도 모른 채.
다음 순간, 갑자기 배 속이 묵직하게 당겨 왔다. 에단은 걸음을 뚝 멈추고 양동이를 떨어뜨렸다.
“아.”
배를 감싸고 웅크려도 소름 끼치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목을 더듬자 쇠로 된 목걸이가 손가락에 걸렸다. 목걸이가 잘 있는데 이러는 걸 보니,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주머니를 뒤졌으나 안에는 든 게 없었다.
낭패감이 일었다. 씻느라 억제제를 잠깐 빼 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어렵게 구한 건데, 하필이면 이럴 때. 에단은 양동이를 들고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누가 새는 페로몬을 느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쳐든 순간, 2층 창가에 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밤,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볼 수 있는 건 눈부신 금발뿐. 아마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단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잽싸게 달렸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억제제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마구 뛰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메리블루만이 제자리에서 고요했다.
* * *
“뭐지?”
로건 메리블루는 창가에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넘실대며 창을 타 넘던 페로몬이 서서히 옅어지며 불쾌감과 흥분을 지웠다.
“무슨 일이야?”
뒤에서 벗은 팔이 닿아 왔다. 방금까지 심한 정사를 치른지라 땀에 젖어 축축했다. 로건은 그 팔을 뿌리치며 중얼거렸다.
“나가.”
상대는 잠깐 멈칫했지만, 당황하지도 되묻지도 않고 바로 옷을 주워 입었다. 로건 메리블루, 그는 편력이 심하기로, 또 하룻밤 상대를 잘 돌아보지 않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상대 역시 내로라하는 세력가였으므로, 자존심 없이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로건은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가라앉았던 성욕이 느릿하고도 확실하게 일어나 사람을 내보낸 게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알 수 있다, 방금 나간 자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분명 창을 넘어온 페로몬이…….
머리가 검은 데다 한밤중이고, 너무 금방 몸을 피한지라 생김새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메리블루 정원에 출입할 수 있는 건 시종뿐이다. 찾아야겠다, 찾아서 하룻밤을 보내자. 금세 결심이 섰다.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음을 먹자 마음이 한결 느긋해지고 나른함이 밀려왔다. 로건은 열린 창을 탁 닫았다. 침대로 가 누우니 금세 잠이 찾아왔다. 푸른 봄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