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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교양학

소통의 교양학

오창호 (지은이)
피앤씨미디어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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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교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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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소통의 교양학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91157300167
· 쪽수 : 374쪽
· 출판일 : 2014-08-30

목차

제1장 인쇄문명의 종언: 맥클루언과 데리다

제2장 탈근대적 커뮤니케이션 양식: 맥클루언과 베야민

제3장 상태주의 매체철학: 맥클루언과 포스트만

제4장 영상미디어 정보환경의 정신역학: 들뢰즈의 영상기호론을 중심으로

제5장 방송저널리즘의 소통기능

제6장 전자매체의 시/공간 특성

제7장 감응의 커뮤니케이션

제8장 정보의 인식론적 기초

저자소개

오창호 (옮긴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박사) 부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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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겠지만 특히 실질적 생산성을 기준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시대에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치학을 잘 안다고 해서 정치를 잘하는 것이 아니고, 경영학을 잘 안다고 해서 회사를 잘 경영하는 것이 아니며, 커뮤니케이션학을 잘 안다고 해서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들 학문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일까? 공부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도 못 할 때, 남는 것은 공부도 하나의 밥벌이, 즉 직업이라는 사실 뿐이다.

직업으로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 물론 이것도 약간의 위안이 될 수 있다. 구조기능주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것도 하나의 직업인 이상 뭔가 이 사회의 유지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을 수 있다. 인재양성(人材養成)! 그렇다. 나는 이 사회, 구체적으로 국가나 기업이 요구하는 그런 쓸모 있는 인력을 생산해내는 지식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이렇게 자신을 위무해보지만 여전히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회의가 가시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학생들이 그 숫한 커뮤니케이션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커뮤니케이션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인재가 되겠는가? 결국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학생을 키울 수도 없다.

최후의 도피처는 교사나 학생 모두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는 것이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학교가 있으니까 교사도 있고 학생도 있으며, 강의를 해야 월급이 나오니까 강의를 하는 것이고, 교재가 있으니까 교재의 내용을 가르친다. 또 학생의 입장에서는 대학졸업장이 필요하니까 대학을 다니는 것이고, 졸업하려면 학점을 이수해야 하니까 수업을 듣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에게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지 말라. 그냥 산이 있으니 산에 오를 뿐이다. 또 사람들에게 왜 사냐고 삶의 이유를 묻지 말자. 그냥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살고 있는 것뿐이다. 어쩌면 이런 자세가 대부분의 범부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별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다가도 마치 우울증처럼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무력감이 엄습할 때, 그래서 속절없이 허송세월하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다는 허무감이 엄습할 때, 도대체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는 의문이 밀려오는 것이다. 왜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것인가? 만약에 내가 대학의 관련학과 교수가 아니었어도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을까? 제도권 커뮤니케이션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자연인)에게도 커뮤니케이션연구가 의미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커뮤니케이션학이 이런 저런 관련자들만이 찾아보는 전문학문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관심 갖는 일반인들이 찾아보는 교양학문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의문은 커뮤니케이션학의 존재 이유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존적인 문제이다. 물론 대부분은 ‘존재의 이유’에 대해 매우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즉 존재의 이유를 어떤 구체적 쓰임(용도)에서 찾는다. 예컨대 방송사나 신문사 혹은 광고대행사 같은 정부기관이나 기업이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정통한 인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정통한 인재를 정부기관이나 기업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곧 커뮤니케이션학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용적 접근태도는 앞서 이야기했던 인재양성이라는 대의로 나타난다. 한 때 인재양성이 교육의 목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봉건 왕제가 해체되고 근대 국가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경제발전이 지상목적이 되었던 산업사회에서 사람은 자본, 토지와 더불어 하나의 자원, 즉 인적자원(human resource)으로 인식되었고 교육의 목적은 그런 인재의 양성이었다.

이 경우 학문의 목적은 단순화된다. 즉 국가에 복무하는 것이다. 국가 그리고 국가의 동반자인 기업은 그러한 복무에 대해 명예와 돈으로 보상한다. 사회적 지위와 금전적 보상을 댓가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능력을 소모시킨다. 한편 국가와 기업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사람, 즉 실업자가 된다. 국가에 복무하고 싶어도 복무할 수 없는 무능력자, 나아가서 국가기구 및 기업의 외부에 있으면서 불만을 품고 전복의 꿈을 꾸는 잠재적 위험인물, 이것이 실업자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기구와 그 공범자인 기업은 취직과 실업, 승진과 좌천, 유직과 퇴직의 문턱 등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다양한 장치로 국민들을 순치시킨다.

이러한 체제에서 학문은 철저히 수단화된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더 이상 기쁨이 될 수 없다. 마치 상인이 상품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듯이, 가르치는 것은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이고 배우는 것은 지식을 전수받는 행위일 뿐이다. 교사가 판매자라면 학생은 구매자이다. 교사와 지식의 관계는 철저히 외부화된다. 교사의 능력이란 얼마나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른바 교수학습법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라면 현재 인터넷 사교육 시장이 보여주듯이, 극단적으로 최고의 교수학습법을 익힌 한 사람의 교사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세상을 발칵 뒤집을 엄청난 연구결과를 내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교수학습법의 달인이 되지도 못하는 평범한 학자는 어디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지난 10여년 이상을 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았다. 도대체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름 독창적인 논문을 썼다고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그게 마치 태평양에 물방울 하나를 더하는 것과 같이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 세상의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세상을 더럽히고 진실을 흐리는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이런 깊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부끄럽게도 최근에야 얻었다. 들뢰즈가 라이프니츠의 말을 빌어 던진 질문, 즉 ‘문도 창도 없는 모나드들이 서로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랜 의문이 풀리는 기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소 오만하게 말한다면 깨달았다.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문도 없고 창도 없는 모나드’와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한국 근대 선불교의 증흥조인 경허(境虛)선사가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쳤다’는 화두를 깨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콧구멍 없는 소’가 모두 같은 것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그리고 결정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이란 것도 그렇지만 공부를 하는 것은 결국 수행(修行)이라는 것을! 닦고 닦고 닦아서 에고(ego)가 사라지고 자신의 진정한 참 모습(self)이 드러날 때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최대 장애가 바로 ‘나’(ego)였던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 장애도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한다면 우선 ‘나’를 죽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은 커뮤니케이션 윤리학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원한다면 ‘나’를 죽이는 수행을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이것이 싫어. 너는 이래서 틀렸어. 저 사람은 저래서 틀렸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니. 정말 실망이다..... 등등 이렇게 ‘나’(ego)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요원하다. 더구나 그 나가 ‘생각하는 나’로서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판단하고, 재단하고, 심판하게 되면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수행의 일차적 대상은 ‘나’라고 할 수 있다. 견고한 나가 있고, 그런 나가 변하지 않으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겠다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 그러나 저자가 지금껏 읽었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수많은 전공서적 어디에도 이를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이론의 문제는 그것이 타당성(validity)과 신뢰성(credibility)의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만약 그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다면, 그 이론은 지식의 지위를 얻고, 다양한 상황에서 활용된다. 유능한 연구자가 해야 할 일이란 타당성과 신뢰성의 어떤 균열점을 발견하고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을 가지고 정교하게 수술하여 완벽하게 매끄러운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론은 하나의 공리계(公理係)로서 기계처럼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즉, 작동가능성(workability)만이 문제다. 나의 의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철시킬 것인가? 어떻게 상대를 설득시킬 것인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국가기구의 관심사이다. 또 자본주의체제의 기업의 관심사이다. 물론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자치국가(自治國家)! 개인이 곧 국가라는 자치국가의 이념의 극단적인 형태를 우리는 철학자 헤겔(Hegel)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인륜의 마지막 단계가 곧 국가라고 말한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해주고 보장해주는 토대로서 인륜의 최고 완성이자 정신의 완전한 실현태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바로 개인과 국가가 합일된, 특수성과 보편성이 통일된 이상 세계라는 전제 하에서만 우리는 관심의 주체를 문제삼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그러나 이런 이상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처해있고 따라서 해결해야 할 상황은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이 아니라 서로 불신하고, 갈등하며, 배신하는 불협화의 세계이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누가 선의 편이고 누가 악의 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혼돈의 세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아야만 하고 희망의 전망을 전할 수 있는 긍정적 커뮤니케이션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학자가 제시해야 할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불통(不通)의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이고, 불통의 벽이 늘어날수록 삶은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될 것이다. 불통즉통(不通卽痛)!

이제야 비로소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책을 읽는 기쁨과 글을 쓰는 기쁨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수행의 맛’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제 내 나이 언 지천명(知天命)이 되었으니 참으로 늦은 나이다. 앞으로 남은 생에서 지금이 그래도 가장 젊은 때라는 우스갯소리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이 기쁨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전해져서 나와 같은 고민과 방황을 겪고 있을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10여 년 동안 연구했던 글들을 모아서 다듬은 것이다. 그 동안 저자가 씨름했던 학자는 두 사람, 즉 맥클루언(McLuhan)과 들뢰즈(Deleuze)였다. 맥클루언은 커뮤니케이션학분야에서는 보기 드믄 매체철학자이다. 매우 독창적이고 기발한 발상과 글쓰기 때문에 한 동안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무슨 예언 같은 아포리즘만 기억될 뿐 제대로 이해되지도 평가되지도 못했던 철학자이다. 저자는 매체철학을 이 땅에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려면 어째든 맥클루언을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뿌려 놓은 씨앗들을 보살피고 키우는 것이 맥클루언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노력의 도정에서 저자는 맥클루언을 중심으로 데리다(Derrida), 벤야민(Benjamin), 포스트만(Postman) 등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성좌(constellation)를 그릴 수 있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했던 문제가 무엇이었으며, 또 어떤 점에서 견해가 서로 엇갈리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 독자 여러분들 각자의 위치를 그려보는 것이 이 글을 읽는 장점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맥클루언이 저자에게 매체철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면, 들뢰즈는 저자에게 번개였다. 들뢰즈를 통해서 절망하기도 했지만 또 그를 통해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로서 들뢰즈에 대해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은 완전히 외계인의 말이었다. 번역본과 대조해가면서 하나 하나 뜯어서 읽어 보았으나 한 페이지를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들뢰즈를 피하고서는 현대철학의 흐름에 동참할 길이 없다는 막다른 골목에서 계속해서 변죽만 올리던 어느 날, 그의 책 <의미의 논리>의 비밀이 풀리기라도 하듯이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펼쳐지는 세계, 그것은 정말 놀라운 세계였다. 그리고 내가 그 토록 찾아 헤매었던 세계이기도 했다.

들뢰즈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아니 어쩌면 들뢰즈의 세계는 너무 어렵지만 또한 너무 쉽다. 들뢰즈의 세계를 저자는 선(禪)의 세계로 이해한다. 그것을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보이는 세계로 이해한다. 사실 많은 동양의 고승들이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저자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저자는 들뢰즈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화려하고 풍부한 참고자료와 방대한 지식, 서양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장대하고 경쾌한 통찰력, 그리고 접근을 불허하는 깍아지른 듯한 적벽(red cliff)이 어느 순간 엄마의 품처럼 아늑한 천개의 고원으로 변하는 마술 같은 매력으로 수천 년 동안 비전(秘典)처럼 전해지던 선의 세계를 현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고마울 따름이다.

여기 실려 있는 몇몇 글은 그렇게 유려한 들뢰즈의 세계에서 길어 올린 아이디어들을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적용한 것이다. 타 학문에서 들뢰즈의 세계를 조명하고 있는 글들은 많이 있으나 커뮤니케이션 학계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 글들의 참신성과 의의가 있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위대한 사상을 어느 학문 분야가 독점할 수는 없다. 더구나 들뢰즈의 세계라고 고집할 실체가 없다. 그것은 새로운 환경에서 또 새로운 분야와 접속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고 어느 시점에서 종결되는 완결체가 아니라 자기 변신을 거듭하면서 종국에는 내가 들뢰즈인지, 들뢰즈가 나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식별불가능한 지대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바람이 된다.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람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혹시 무더운 어느 여름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잠시라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면, 아니면 저 바람이 내 몽롱한 의식에 세찬 기운을 불어넣어 내 의식이 또릿또릿 해졌다면, 그것으로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까? 거장은 갔지만 여운은 오히려 더욱 생생해진다. 나 또한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지나친 욕심일까? 참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니 그것도 아득한데, 앞으로 가야할 길을 바라보니 그 또한 막막하다. 오직 기댈 것은 수행뿐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저자가 지난 10여 년간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논문들이다. 논문들은 애초에 쓸 때 훗날 단행본으로 엮을 것을 염두에 두고 썼으나 논문의 형식을 따르다보니 아무래도 단행본으로서의 일관성과 체계성 기준에서 미흡하다. 그러나 수목형 배치가 아니라 리좀형 배치를 따르라는 들뢰즈의 기준에서 보면, 각 장마다 하나의 고원을 이루고 있고 각각의 고원이 고립무원이 아니라 가느다란 실로 이어져 있어 책을 읽는 색다른 맛을 느낄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역시 책을 맛있게 읽는 법은 행간을 읽는 것이다. 저자가 혹 ‘바담 풍’ 하더라도 독자제현께서 ‘바람 풍’으로 새겨서 읽어주시면 고맙겠다.

개별 글들의 출판 정보를 참고로 밝힌다. 제1장 ‘맥클루언과 데리다’의 원 제목은 ‘맥루한의 매체철학에 대한 비판적 소고’로, <한국언론학보>(47-5, 2003, 10)에 실렸다. 제2장 ‘맥클루언과 벤야민’의 원 논문은 <한국언론학보>(48-3, 2004, 6)에, 제3장 ‘맥클루언과 포스트만’의 원 논문은 <한국언론학보>(52-2, 2008, 4)에, 제4장 ‘영상미디어 정보환경의 정신역동’은 <한국방송학보>(22-5, 2008)에, 제5장 ‘저널리즘과 소통의 언어’는 ‘들뢰즈의 언어이론으로 본 방송저널리즘의 소통기능에 대한 고찰’이란 원제목으로 <언론학 연구>(20-1, 2014)에, 제6장 ‘전자매체의 시?공간 특성’은 <언론과 사회>(20-1, 2012)에, 제7장 ‘감응의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이론>(10-2, 2014)에, 제8장 ‘정보의 인식론적 기초’는 <매체산업과 미디어기술>(나남, 2004)에 각각 실렸다.

2014년 8월
오 창 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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