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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외국 과학소설
· ISBN : 9791162336076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18-07-24
책 소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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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내가 온 곳에서도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공간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시간 여행이 완전 헛소리인지 알려주겠다. 바로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하루에 한 번 고정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며, 1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태양 역시 태양계와 함께 우주 안에서 움직이며, 우주를 가로질러 광대한 방랑의 여정을 이어가는 은하계 속으로 사정없이 달려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사실 정말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적도를 따라서 지구는 시속 16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하루 24시간 회전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시속 10만 7천 킬로미터를 조금 넘는 속도로 태양 주위를 궤도에 따라 공전한다. 하루에 257만 5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태양계는 시속 210만 킬로미터 조금 안 되는 속도로 은하계를 향해 움직이며, 하루에 약 5150만 킬로미터에 약간 못 미치는 거리를 이동한다.
어제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난다 해도, 지구는 이미 어제와는 다른 공간에 있다. 딱 1초 뒤로 시간 여행을 갔다 해도, 우리 발밑의 지구는 거의 500미터 가까이 이동해 버렸을 것이다. 단1 초 동안에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 나오는 시간 여행이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구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항상. 하루 앞으로 시간 여행을 한다 해도, 같은 장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아마 지구 바깥의 거대한 진공 상태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녀가 내게 키스했다. 나는 그녀와의 키스를 수도 없이 상상했지만, 정작 이 키스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촉각적인 면에서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 강렬한 끌림이라니. 그건 아마도 우리의 신체가 고의적으로 닿은 최초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공허한 공간 속에서 482킬로미터에 달하는 대기에 둘러싸인 321,868,800평방킬로미터의 암석과 금속과 물로 이루어진 둥글고 딱딱한 표면 위에 서서, 빛나는 조각상들에 둘러싸인 채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누르던 그 순간. 그건 내 인생 최고의 키스였다. 최악의 키스였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먼저 키스를 마친 쪽은 페넬로페였다. 그녀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 순간 나는 이제 다시는 페넬로페와 키스할 수 없겠구나, 그러니 남은 평생 다른 사람들과 키스하면서 지금 이 키스의 느낌을 재현하려 하겠구나, 그런데 과연 내가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나랑 함께 가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시간의 닻’인 것이다. 내가 역사의 흐름을 일그러뜨렸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없어도 되는 역사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여기에 내가 존재하도록 만들어준 사건들은 그대로 일어나 평행 세계에서 내가 있던 시간에 나를 갖다놓은 것이다. 정식 용어로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게 이론을 증명한 꼴이 되어 미안하긴 한데) ‘시간의 항력’이다. 1965년 7월 11일에서 1983년 10월 2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전혀 상관없이, 아빠와 엄마는 똑같은 인물이었고, 나라는 존재를 똑같이 만들기 위해 똑같은 시간에 짝짓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1965년 7월 11일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은 모두 운이 좋지 않았다. 도미노 효과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내 시간 왜곡 효과에 영향을 받지 않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예정대로 태어났다. 하지만 2016년에 이르면, 태어날 일이 없었던 수십억의 사람들이 태어나 있고, 태어났어야 할 수십 억의 사람들은 수정조차 되지 못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나 때문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해서 기분이 좋지도 않다. 내 감정은 나 때문에 존재조차 못 하게 된 사람들한테만 쏠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