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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역사학
· ISBN : 9791165032166
· 쪽수 : 385쪽
· 출판일 : 2023-10-31
책 소개
목차
제1장
신해혁명기 사천 혁명파 신사의 동향 ∙ 015
제2장
신해혁명기 사천의 무장봉기 ∙ 129
제3장
사천보로운동의 다면적 성격을 둘러싼 일고찰 ∙ 187
제4장
촉군정부의 성립과 통합군정부의 성립 과정 ∙ 269
제5장
신해혁명 후 사천 동맹회원의 동향 ∙ 319
저자 후기 ∙ 357
저자소개
책속에서
[ 저자서문 ]
본서는 필자가 일본 교토대학교 동양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을 토대로 집필했다. 박사학위 논문 중에서 신해혁명과 관련된 논문만 분류해서 정리했다. 또한 국내 학술지에 발표한 신해혁명 관련 논문도 정리해서 본서에 수록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어로 작성한 것이었다. 물론 박사학위 논문의 대다수는 국내 학술지에도 게재한 바 있다. 본서는 처음에 박사학위 논문 전체와 그동안 필자가 발표한 사천성 관련 논문을 모두 묶어 《청대 사천지역사 연구》 혹은 《청말민국기 사천지역사 연구》라는 제목으로 간행할 계획이었다.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고심 끝에 신해혁명은 일반인도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고 필자가 작성한 논문도 사천 신해혁명이 중심이므로 사천지역에서 활동한 혁명파의 활동을 중심으로 《사천 신해혁명사 연구》라는 주제로 집필 방향을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발표한 논문은 한자가 너무 많이 사용되어 있었다. 그것은 필자가 초기에 일본어로 박사논문을 집필한 것에도 관련되어 있다.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집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논문 수정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논문 수정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한자로 된 용어나 문장을 일일이 수정하는 일은 너무나 번거롭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지루한 작업을 하던 과정에 집필하는 방법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기존에 발표한 논문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각주를 제외하고 본문의 모든 내용은 한글로 작성하고 가능하면 문장은 간결하게 작성했다. 한자식으로 표기되어 있는 인명이나 용어도 대부분 한글로 바꾸었
다. 아울러 논문의 본문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술하지 않는 용어의 설명이나 독자들이 본서를 읽으면서 참고가 될만한 내용 등도 추가하여 집필했다.
본서는 신해혁명기 사천 혁명파 및 혁명파 신사의 동향을 검토했다. 제1장에서는 신해혁명기 사천에서 활동한 동맹회원 중 신사의 자격을 지닌 인물들을 검토했다. 동맹회원 중 과거공명을 지닌 신사를 입헌파 신사와 상대적인 개념인 혁명파 신사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들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제2장에서는 신해혁명기 사천성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검토했다. 사천성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는 동맹회에서 주관한 무장봉기에 비해 규모도 작고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 무장봉기이다. 제3장에서는 사천보로운동의 다면적 성격에 대한 시론적 연구를 진행했다. 사천보로운동은 이권회수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성도혈안을 계기로 사천 전 지역에서
보로동지군이 조직되어 무장봉기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는 사천에서 활동한 혁명파가 사천보로운동을 혁명운동으로 전환시킨 것에 있었다. 제4장에서는 촉군정부의 성립과 전개과정에 대해 검토했다. 촉군정부는 사천성에서 수립된 성 단위의 군정부 중의 하나이다. 동시에 혁명파가 중심이 된 혁명파 정권이다. 사천성은 성단위의 군정부가 성도와 중경에 각각 수립되었다. 촉군정부는 중경에 수립된 군정부였고 혁명파의 활동이 강한 지역이 중경이었으므로 촉군정부는 혁명파 정권이 될 수 있었다. 제5장에서는 신해혁명 후 사천 동맹회원의 동향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웅극무와 양서감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2차혁명, 호국운동, 호법운동기의
동향을 파악했다. 동맹회원들은 통합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분열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신해혁명기 입헌파 신사에 대한 연구는 많은 연구자에 의해 광범위하게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에 입헌파 신사라는 용어는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헌파 신사와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혁명파 신사는 아직 학계에서 정립된 용어는 아니다. 필자는 신해혁명기 사천성에서 혁명파로 활동했던 신사층에 대한 관심을 석사과정부터 가지기 시작했다. 석사과정에서 사천 혁명파 신사를 연구하기 위해 사천성 지방지를 국내의 여러 대학 도서관을 전전하며 입수했다. 하지만 사천 신해혁명과 관련된 제한된 측면에서만 자료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사천성에서 활동한 혁명파 신사를 개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 사천으
로 유학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혁명파 가운데 과거공명을 소지한 신사들을 개별적으로 조사하는 작업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데 가장 큰 한계를 느낀 점은 관련 자료의 부족이었다.
필자는 사천사범대학교 역사학과 연구생의 신분으로 처음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은 각 지역마다 여러 유형의 방언이 있다. 사천 방언은 표준어와는 발음이나 성조가 상당히 달랐다. 연구생 신분으로 수업에 참가했을 때 사천 방언을 사용하시는 교수님의 수업 내용을 처음에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다행히 사천사범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근대사를 전공하시는 양티엔홍(楊天宏) 교수는 중국 학생의 석사과정 전공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생 신분으로 수업에 참가한 필자를 위해 필기도구에 중요한 내용을 적어 수업 내용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는 친절한 배려를 베풀어 주셨다. 필자가 사천 방언을 대충 알아듣기까지에는 약 1년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천사범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사천근대사와 관련된 수업에 참가하고 도서관에서 각종 자료를 수집한 후 사천을 대표하는 사천대학교로 이동했다. 사천대학교 역사학과에는 사천지역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웨이잉타오(隗瀛濤)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언어 습득에 편리한 사천사범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한 후에 사천대학교 역사학과로 유학생활의 경로를 바꾸었다. 사천사범대학교와 사천대학교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사천 혁명파 신사의 동향에 관한 글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사천 혁명파 신사에 관한 글을 입체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난항을 겪어야 했다. 혁명파 신사라는 용어는 학계에서도 사용하지 않고 사료에도 혁명파 신사로 기술하는 경우는 없다. 사천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동맹회원 중에 과거공명을 획득한 인물을 각 주현 단위로 한 명씩 찾아나가는 작업을 거의 2년 동안이나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 2년 동안 각종 자료를 검토한 후에 필자가 조사한 사천 혁명파 신사는 모두 120명이다. 자료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면 이 숫자보다 약간 더 많은 혁명파 신사를 추출해서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필자가 조사한 120명의 사천 혁명파 신사는 사천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중심적인 혁명파 신사는 거의 망라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수치이다. 이 120명의 혁명파 신사를 추출하는 작업이 토대가 되어 신해혁명기 사천 혁명파 신사의 동향을 검토하는 데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기회가 된다면 사천성 이외의 혁명파 신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었으나 현재까지도 이 연구는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른 지역의 혁명파 신사를 연구하려면 또다시 신사를 개별적으로 조사해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해야 하는데 관련 자료를
입수하는 것도 쉽지 않고 개별적으로 신사를 추출하는 데에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보면 다른 지역의 혁명파 신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천성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혁명파 신사에 관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신해혁명기 혁명파 신사에 관한 종합적인 논점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필자가 중국사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학부 과정에서 조병한 교수의 강의를 수강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병한 교수의 중국근대사 강의와 청대 조익이 저술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라는 원전 강독 수업을 수강하면서 중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병한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다면 필자가 중국사를 전공으로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천 신해혁명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에서 이개석 교수의 중국근대사 강의를 수강하면서 이 분야에 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천 유학으로 이어져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었다. 중국 사천에서 석사논문의 기초적인 작업을 완성한 후 국내로 돌아와 석사논문을 제출할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필자의 논문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시고 논문이 수정되어야 할 부분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필자에게 가르침을 주신 분이 퇴임하신 이개석 교수였다. 조병한 교수와 이개석 교수 두 분은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영원한 스승님이시다. 조병한 교수와 이개석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중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천사범대학교의 양티엔홍 교수, 사천대학교의 웨이잉타오 교수의 도움으로 다행히 자료 수집과 논문 작성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사천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사천에서 석사논문의 기초적인 작업을 한 후에 귀국해서 국내 대학원에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이개석 교수는 논문의 전체적인 틀을 잡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셨다. 석사졸업 후 다행스럽게도 일본 나카지마헤이와재단에서 모집하는 아시아태평양 초청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교토대학교 동양사연구실 연구생이 될 수 있었다. 이어 교토대학교 문학연구과 동양사학과 박사과정의 시험
에 응시하여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교토대학교 동양사학과는 석박사통합과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필자는 국내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교토대학교 동양사학과 석박사통합과정의 박사전기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물론 석사논문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제출해야만 했다. 석박사통합과정에서는 석사과정은 박사전기과정이고 박사과정은 박사후기과정에 해당했다. 필자는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에도 신해혁명기 사천 혁명파의 동향에 관한 연구를 계속적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교토대학교 동양사학과 후마 스스무(夫馬進) 지도교수와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 교수로부터 학문적 도움과 유학 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후마 스스무 교수와 스기야마 마사아키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책을 출간하는 데 가장 큰 조언과 도움을 주신 분은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이상훈 교수이다. 필자가 책을 출간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간의 연구를 모아 책을 집필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주셨다. 그 외에도 이상훈 교수는 본서의 글을 세심하게 읽고 많은 조언을 해 주셨다. 이상훈 교수의 조언과 도움이 없었다면 본서를 집필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이상훈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중국 유학이나 일본 유학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주신 임대희 교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다. 또한 작고하신 석사과정 지도교수이신 김한식 교수는 중국근대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김한식 교수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다. 그 외에도 이 글을 작성하는 데에는 수많은 선생님과 선배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김세호 교수, 정순모 교수, 장의식 교수, 최덕경 교수, 이학로 교수, 도중만 교수, 강판권 교수, 장인성 교수, 정성일 교수, 박제균 교수, 임병덕 교수, 홍성구 교수, 김종건 교수, 전영섭 교수, 홍성화 교수 등으로부터 지금까지 학문적인 방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열악한 인문학 학술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출간을 승낙해주신 충남대학교 출판문화원에도 감사드린다. 오랜 기간 병상에 누워계시는 어머님 김일화 여사는 어리석은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고 지금까지 열렬하게 응원해 주시고 지원해 주셨는데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분 중의 한 분이시다. 어머님이 병상에서 일어나시는 데 조금이나마 이 책이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항상 남편을 믿고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 성은정 박사께는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공존한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빠의 중국사 연구에 동참해서 역사를 좋아하는 사랑하는 딸 박서영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작년부터 하늘에서 필자를 지켜봐 주시는 아버님께 이 책을 바친다.
광범한 민중까지 참가한 보로운동은 단순히 철도국유화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은 아니었다. 이권을 회수하기 위한 이권회수운동의 의미만 내포된 것이 아니었다. 사천 입헌파 신사는 보로운동 과정에서 파약보로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헌정 실행을 요구했다. 이는 청조가 추진한 입헌정책의 과정에서 이행된 철도부설과 관련된 입헌운동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수많은 민중들이 사천보로운동에 참가한 것은 입헌운동을 위해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이권과 관련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민중들이 자신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보로운동에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철로권을 서양 열강에게 내어 주는 이른바 매로행위에 대한 규탄이었다. 철로권이라는 주권을 지키기 위한 주권수호운동이었고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침탈하는 행위에 대한 반제국주의운동이었다. 동시에 모든 민중이 참가한 근대적인 민중운동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봉건 전제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민권주의를 실행한 민주운동이었다. 특히 혁명파의 입장에서 보면 보로운동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전개한 혁명운동이기도 했다. 혁명파는 보로라는 이름을 빌어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로운동은 혁명운동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보로운동은 보로운동으로 종식된 것이 아니라 혁명운동으로 종식되었다. 사천보로운동은 입헌운동, 이권회수운동, 주권수호운동, 반제국주의운동, 민중운동, 혁명운동 등 다양한 성격을 지닌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