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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5342203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22-05-21
책 소개
목차
꽃잎 아기를 기다리며
국화꽃 향기
벼랑
바다
첫 키스
결빙의 시간들
은빛 겨울 속의 한여름
은사시나무, 사랑, 가을
프러포즈
바다가 들어오는 방
세월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들
선택
폐교
태아
흐르는 강물
절망이 슬픔에 닿기까지
주문
그들만의 가을
주단 인형
은행나무 아래에서의 댄싱
전투
오리온자리
여심
겨울이 낳은 봄
미소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남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여자의 손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의 여자가 언뜻 정신을 차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남자는 허둥거리며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가져갔다.
“거…… 걱정하지 말라구? 그래, 걱정 안 해. 당신은 잘 해낼 거야. 난 믿어. 당신과 우리 아기 모두 잘 해낼 거야!”
남자는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삭정이처럼 마른 여자는 자신의 뼈마디만 남은 손을 움켜잡은 남자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자는 깊은 눈빛으로 말없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납작하게 짓누르는지 허리와 어깨를 뒤틀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수술실 문을 여느라 잠시 침대가 멈췄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여자의 뺨을 감쌌다. 그 손바닥 안으로 여자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미주야! 나, 나, 여기 있을게. 잊지 마. 내가 지키고 있는 한 모든 게 잘될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여자는 바싹 말라 타들어 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 짧은 찰나에 그녀는 안타까이 자신의 손을 놓는 남자를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금니를 깨문 채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던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펴들고는 여자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러나 여자는 너무나 다급한 표정으로 반쯤 허리를 일으키며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도 여자의 손을 향해 몇 걸음을 황급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실은 침대는 이내 수술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코앞에서 문이 닫히자 그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실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한동안 얼어붙은 듯 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벽에 기댔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쥔 채 복도 천장을 향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 꽃잎 아기를 기다리며
승우는 팸플릿 뭉치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여자 뒤로 가서 섰다. 빈틈없는 자세였다. 전철이 흔들리자 문득 그녀의 머릿결에서 국화꽃 같은 향이 났다. 청명한 날씨의 푸른 들판에 핀 들국화 같은. 분명히 그 내음이었다. 놀라웠다. 지하철은 사람들의 냄새로 뒤섞여 향기란 게 제대로 느껴질 리 만무했다. 미량의 향기를 발산하는 그녀의 뒤에 선 승우는 가슴속 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떨림을 느꼈다.
161cm의 알맞은 키에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그녀는 무거워 보이는 팸플릿 뭉치를 든 채 앞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면박을 당했던 처지라 ‘들어드릴까요?’라는 말도 주저되었다.
승우는 그녀의 머릿결 가까이에 코를 대고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틀림없는 국화 내음이었다. 야생의 싱그러움과 햇빛 분말이 노랗게 날아다니는 듯, 은은하면서도 담백한.
요즘 국화 향이 나는 샴푸가 새로 나왔나?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 머릿결에서 국화 향이 나는 여자…….
멀대같이 큰 키에 부지깽이같이 기다란 다리를 가진 그는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이내 따라잡았다.
“저…… 뭐 좀 여쭤보겠습니다.”
“네?”
“이 근처에 〈황금 가면〉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생맥줏집이라던데요.”
승우는 혹시라도 자신이 지하철 안에서의 면박을 앙갚음하려는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일까 싶어서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 집을 낀 골목 끝에 〈매직 넘버〉란 카페가 있는데 오늘 그곳에서 모임이 있거든요.”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표정이었다. 미간과 코의 주름이 살포시 접혔다가 천천히 다림질하듯 펴졌다. 그녀는 들고 있던 짐을 억울하다는 듯 잠시 보더니 갑자기 그에게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았다.
- 국화꽃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