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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3187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25-03-18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6
해방고시원 13
나부의 춤 49
수피(樹皮) 73
불 꺼진 창 99
선택의 변명 129
드림캐처 155
일그러진 초상 185
회전레일 213
푸른 날개 241
해설 │ 박다솜(문학평론가) 269
수피(樹皮)의 온기 267
저자소개
책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뜨거운 춤사위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숲속은 어둡고 나무는 빼곡하다. 나무는 부피를 늘리지 못하고 키만 키웠다. 나무들이 빛을 찾아 하늘로만 솟았다. 가느다란 나무에 잎이 무성하다. 줄기와 잎들이 얼기설기 제멋대로 엉켜있다. 흡사 죽은 자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모습이다.”
*해방고시원
밖이 부산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인데 복도에서 나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방문을 여닫는 소리, 이방 저방 옮겨 다니는 발걸음 소리,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낄낄 웃는 소리. 자기들끼리 조심한다고 목소리를 낮춰 말하지만, 고스란히 들렸다. 해방고시원 22호, 23호 공시생들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시생들은 항상 허겁지겁 뛰쳐나갔으며 술을 마시고 늦은 시간에 들어왔다. 그런 다음 날은 학원에 가지 않고 정오까지 늦잠을 잤다. 술을 먹지 않고 들어오는 날은 지금처럼 분주하게 서로의 방을 오갔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맨 위층에 머무는데 두 개의 방이 붙어있는 곳을 원해 아래층에 있게 됐다. 처음 입실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일어나 주의 시키고 싶었지만 싫은 소리 하기가 나한테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청춘의 시간을 보내는 일도 힘겨운 것을 알고 있어서 저 정도의 소음은 참았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그들이 오래 있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계속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이번에는 새벽에 나갔던 틀니 아저씨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술을 많이 마신 것을 알 수 있다. 틀니 아저씨는 술이 과하면 치아 사이로 방울뱀 지나가는 소리를 내며 헛기침하는 버릇이 있다. 목이 아픈 것인지 치아가 아니 틀니가 불편한 것인지 염려가 될 정도였다. 방으로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짙은 밤이 될수록 시나리오를 쓴다는 옆방 안경 여자의 자판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안경 여자와 마주친 적은 거의 없었다. 키가 작고 안경을 썼다는 것 외에 이목구비와 음성은 모른다. 그녀도 나처럼 사람을 피했다.
그들과 이야기해 보지 않았지만, 어떤 생활을 하는지 그려졌다. 이곳에서 극도로 말하지 않고 살지만 청력의 기능은 나날이 예민해졌다. 소리에 민감한 만큼 입을 닫았다. 그들끼리 마주치며 나누는 이야기, 고시원 원장이 친밀감으로 건네는 인사말에서 잡다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고시원 원장은 아침 아홉 시 출근해 저녁 아홉 시에 퇴근했다. 총무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밤늦은 시간에 소음으로 불편한 경우 입실자들은 벽을 두드리거나 나가서 노크로 주의 시키곤 했다. 때론 서로 마음이 상해 큰소리가 오갔다. 고시원 원장이 출근하면 지난밤 별일 없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 물음이 불편할 적이 많았다. 핸드폰으로 연결된 CCTV를 통해 알 수 있지만, 항상 인사처럼 나에게 말을 걸었다.
불면으로 또 새벽을 맞이했다. 시계를 볼 적마다 숫자는 한 시간씩 넘어갔다. 잠과 사투 끝에 패잔병으로 어둠을 마쳤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울을 봤다. 얼굴에 어둠이 들러붙어 있다. 잠을 자지 못했다는 심리적 피로감을 떨치기 위해 청소함에서 대걸레를 집었다.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고시원 복도를 힘차게 밀었다. 천장에 붙어있는 검은색 감시자를 슬쩍 쳐다봤다. 고시원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여다보듯 CCTV는 어두운 시선으로 나를 주시했다. 곳곳에 있는 검은 감시자는 고시원 전체를 지켜봤다. 원장이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어깨가 움츠러졌다.
해방고시원에서 칠 년을 살았다. 처음 일 년을 보낸 뒤부터 청소하는 일을 계속했다. 이 일이 싫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활에 보탬도 되고 불면증과 우울증, 대인기피증이 있는 나로서는 최적의 일이었다.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새벽 청소로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무기력증에서 잠시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일이 얼마 전까지 유일한 직업이었다. 고시원 원장이 몇 해 전에 총무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했었다. 은둔형인 나에게 쉽지 않은 제의였고 큰 배려를 해주었지만,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었고 개운치 않은 원장의 호의도 꺼림직해서 거절했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은 불면과 우울처럼 항상 따라다녔다.
청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두 평 남짓 좁은 방의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창문과 지저분한 짐들이 보였다. 곳곳에 놓인 종이 쇼핑백은 어림잡아 스무 개도 넘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허접한 것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누추한 짐이 보기 싫어 창문 쪽으로 돌아누웠다. 창틀에 있던 새벽 냉기가 내려와 서늘했다.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졸음이 쏟아져 눈이 반쯤 감겼다.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창백한 아침 하늘이 보였다. 몇 년 전 창문 없는 방에서 지냈던 때가 생각났다. 처음 해방고시원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무것도 체감하지 못했다. 답답함도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고 모든 감각과 생각이 마비되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살았는지 모른다. 현실을 깊이 생각했다면 지금쯤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창문 있는 방으로 옮기기까지 오 년이 걸렸다. 오십 센티미터 창문을 품기 위해 매달 오만 원의 돈을 더 지급해야 했다. 해방고시원 내에서 방을 옮겼을 때 작은 창문만큼의 기쁨이 있었다.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첫 번째로 기억되는 특별한 날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창문은 나에게 사치 품목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에 한동안 편치 않았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소음은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연결해 주었고, 햇빛과 바람은 고뇌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네모난 작은 하늘은 푸른색, 붉은색, 먹색 등 시시때때로 변화무쌍한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었고, 삶의 빛도 함께 보여주었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나는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꿈틀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