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명상/선
· ISBN : 9791185062297
· 쪽수 : 648쪽
· 출판일 : 2020-01-11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 6
제 1 장 데비가 물었다 · 13
1. 데비 우바차
2. 최고의 대화 – 기도 혹은 독백
3. 이런 책을 읽으려면
제 2 장 아눗타라 · 57
1. 지고(至高) 혹은 “더 없는 것”
2. <궁극의 실재> - 모든 문답이 쉬는 곳
제 3 장 <케차리와의 동일성> · 123
1. 케차리 사마타
2. 시종(始終)인 에너지
제 4 장 가슴 · 181
1. 이것은 내 가슴에 있나니
2. 가슴이라는 공간
제 5 장 인칭과 호칭 · 239
제 6 장 절대(絶對)의 현현 · 259
1. 음소의 방사
2. 니르비칼파 삼빗 - 말과 생각의 밑바탕
3. 탓트와의 전개
4. 사르밤 사르바트마캄
5. 말리니와 마트리카
제 7 장 현현의 수준 · 405
1. 카울리카 스리슈티
2. 그 거울에 비친 비밀들
제 8 장 가슴의 씨앗 · 499
1. 흐리다야 비자 – “소(Sauḥ)”
제 9 장 의례(儀禮)를 넘어 · 571
1. 정말이지 <아는 것>이……
2. 그래서 얻는 것은
나가며 · 644
저자소개
책속에서
❚ 본문 중에서 - 들어가며
『파라 트리쉬카』는 카시미르 쉐이비즘 경전 중에서도 최상급의 이해(理解)를 요(要)한다는 것은, 이 책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으리라.
특히 우리에게는 생소한 산스크리트 알파벳까지 등장하니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극소수(極少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아무런 부담(?) 없이 마음껏 이 책을 가다듬는다. (1,000 쪽쯤이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출판하려는 책의 부피를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필자의 다른 책들도 그랬듯이, <또 다른 독자(읽는 자)인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자.
『파라 트리쉬카』는 『비갸나 바이라바』와 더불어 저 『루드라―야말라 탄트라』의 한 부분(部分)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또 우리는 저 『말리니―비자야 탄트라』라는 이름도 잊을 수 없다!)
『비갸나 바이라바』에서 데비는 묻는다.
아! 쉬바여.
당신의 실재(實在)는 무엇입니까?
경이(驚異)로 가득 찬 이 우주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실재는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입니까?
아니면 내재적인가요? 아니면 초월적인가요?
내재적이라면, 초월적인 것과는 모순(矛盾)입니다.
누가 예배(禮拜)를 받으며,
누가 그 예배에 의해 만족하게 됩니까?
누가 기도(祈禱)를 받으며,
기도가 무엇인지 말해 주소서.
위대한 주(主)여!
아직도 저의 의심(疑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시를 빼기 위한 가시 『비갸나 바이라바』에서 우리가 데비의 질문은 제쳐두고, 쉬바의 대답인 <112 방편>을 다루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렸다면, 이제 이 『파라 트리쉬카』에서는 데비의 질문에 그 초점을 맞춘다.
[필자는 비갸나 바이라바의 163 절 전문(全文)을 (책의 부피 등으로) 다 실을 수 없었다.]
진실로, 질문(質問) 속에 답(答)이 있지만……
우리는 <그 답>을 비갸나 바이라바의 112 방편으로 이미 확보하고 있다. [물론 <그 답>이 정말로 내 것이냐는 우리 각자(各自)의 몫이고……]
비갸나 바이라바에서는 데비가 나중에 ― 쉬바의 <긴 대답[방편(方便) 소개]>을 듣고 만족(滿足)하여 ? 쉬바와 더불어 <합일(合一, 라야, 용해)의 기쁨>으로 젖어든다.
그러나 파라 트리쉬카에서는 그런 <극적(劇的)인 결론>을 취하지는 않는다.
36 절이 전부인 이 작은 경전을, 아비나바굽타는 주석을 했다. 아니 해석을 했다.
<주석>과 <해석>의 차이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차이를 <뚜렷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그 차이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비나바굽타의 해석을 따라가며 나의 <존재 혹은 현존의 순간>을 ? 카시미르 쉐이비즘 용어로, “나―의식”을 ? 알아채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神)이다.
기독교 용어로는 <(내) “속에서 말하게 하는” 그 무엇>(마10:20)을 알아채고 느끼자는 것이다.
?
우리는 모두 “말을 한다.” 심지어 농아(聾啞)도 나름의 언어로 ? 수화(手話)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들도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讀者)여! 혹 <이런 것>을 생각해보거나 관찰해본 적이 있는가? 즉
“내가 말을 할 때, 내 속에서 어떤 과정(현상)이 일어나기에, 내가 말을 하게 되는지를……”
내가 <말 혹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도대체 <내 속에서 “그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
잠시 책을 덮고…… 그것을 느껴보라.
이 책은 <그런 것>에 대한 경험자(經驗者)들의 경험과 지혜를 자세히 전해 주는 책이다.
현대의 어떤 언어학자(스티븐 핑커)는 <우리가 “말을 한다”는 사실>을 “언어 본능(the Language Instinct)”이라고 했다.
?
우리는 흔히 어떤 음식을 먹고는 “맛있다!”거나 “맛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맛없는> 음식은 없다!”고 한다. 필자가 아는 한, <맛없는> 음식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만드는 음식 중에 맛이 없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것을 카시미르 쉐이비즘의 말로 풀이하면, <마이야 말>과 <아―마이야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마야)에 속하는(마이야) 상식적인 말>과 <그렇지 않은 말> 말이다.
?
각설하고,
이 삼위일체경(三位一體經) 『파라 트리쉬카』를 꾸미며 참고한 것들을 소개한다.
1. 『Para―trisika―Vivarana』
Jaideva Singh, 1998
(아래의 Bettina Baumer 그녀가 편집했다.)
2. 『Abhinavagupta’s Hermeneutics
of the Absolute』 ― Anuttaraprakriya ―
Bettina Baumer, 2011
3. 『Vac』 ? The concept of the Word
in selected Hindu Tantras ―
Andre Padoux, 1992
원래 『파라 트리쉬카 비바라나』 앞부분에 있는 <서시(序詩) 형태의 몇 절>과 뒤에 있는 <자서전적 절>은 여기서는 책의 부피를 고려하여 생략한다.
<서시>와 또 <의례, 의식(儀式)> 부분은 탄트라 사라의 해당하는 곳에서 (보다 자세히(?)) 다룬다.
바우치 서재(書齋)에서
< 3 > 이런 책을 읽으려면
[어떤 책을 읽고 있을 때, “내가 아주 간절하고, 진지하여 그 속에 푹 빠져들어 있을 때” ? 그 책의 문장이 묘사하는 내용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 마치 그 활자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아니 <그 활자(로서 나는 소리)가 바로 내 속에서 (마치 그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그 순간 우리는 화들짝 놀란다.
이런 상황은 <경전과 독자(“읽는 자”)의 관계>가 그 옛날 인도(印度)에서 강조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삼반다)>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영성가의 경험에서 <내면의 소리>, <신(神)의 말씀> 등으로 부르는 그 무엇……]
이것은 <지식의 힘>이 특징인 파쉬얀티와 마드야마 단계에서 <의지의 힘(파라 바크)>이 특징인 <지고의 의식>의 경험이다. 이것은 모든 경전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목표다.
그러므로 <인식(認識)의 힘(갸나 샥티)>에서는 <신성의 나―의식의 가장 높은 만트라 에너지>의 실제적인 경험이 있다. 그것만이 사다―쉬바의 특성인데, 하나는 데비의 질문의 모습으로 하나는 바이라바의 대답의 모습으로, 그 안에 “D, e, v, i, u, v, a, ca” 와 “Bh, ai, r, a, va, u, v, a, ca”의 문자의 수단으로 “데비 우바차(데비가 물었다)”와 “바이라바 우바차(바이라바가 답했다)”라는 언어의 형태가 있다.
스왓찬다 탄트라는 말한다.
사다―쉬바 자신이 스승과 제자의 위치를 떠맡고
<질문>과 <대답>으로 탄트라를 드러내도다.
그러므로 신성의 <은혜의 힘>은 항상(恒常)이고, 모든 경험자에서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니 <트리카 경전의 생명과 영혼>인 그녀(<은혜의 힘>) 홀로, <경험자>와 <신성의 의식> 사이에 지고의 관계를 구성한다.
<아눗타라의 일>에서는 ? 아눗타라(지고(至高), 더 없는 것)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 <모든 종류의 관계>는 그 가르침과 일치하고, 오직 지고(至高)를 목표로 한다.
똑같은 것을 트리카―흐리다야도 말한다.
“지고의 주는 그의 샥티를 통해 항상 창조성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은혜의 비>를 내리고, (오직 은혜를 위해) 어떤 금(禁)함도 없이 현현하고 철수한다.”
[참고로 여섯 가지의 관계(삼반다)가 있다.
1) 파라 삼반다 :
질문자와 대답자 둘 다 쉬바로, 최고의 관계다.
<신성의 의식> 속으로 용해되는 것을 말한다.
2) 마하 삼반다 :
질문자는 사다―쉬바, 대답자는 쉬바다.
3) 안타랄라 삼반다 :
질문자 아난타밧타라카, 대답자 사다―쉬바.
4) 디뱌 삼반다 :
질문자 난다쿠마라, 대답자 아난타밧타라카.
5) 디뱌―아디뱌 삼반다 :
질문자 사낫쿠마라, 대답자 난디.
6) 아디뱌 삼반다 :
질문자와 대답자 둘 다 <인간 존재>일 때다.]
그러니 거기에는 항상 아눗타라의 능동적 현존이 있다. 그래서 <주의 의식에서 분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질문―대답>은
<파쉬얀티 단계>에서는 (어떤 욕망을) <문자>와 <말>, <문장>으로 배분하고 할당하려는 <미―확정적 형태(니르비칼파)>이고,
<마드야마 단계>에서는 (그 어떤) 분리의 느낌을 가진 <확정적 형태(사비칼파)>이고,
<바이카리 단계>에서는 <마이야 문자(음소)>, <말>, <문장>으로 구성되는 <거친(육성) 언설>인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아눗타라가 어떻게……”
이것은 <현현의 느낌이 가득한> 바이라바의 저 <관찰이 불가능한 면(즉 샥티)>이다. 그것의 핵심은 능가(凌駕)할 수 없는 나―의식이고, 쉬바와 샥티의 결합으로 생긴 동요(動搖)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여기의 동요는 현현의 충동을 말한다.)
트리카 전통(의 철학과 실천)에 따르면, 쉬바는 <a>로 <출현의 근원>을, 또 샥티는 <?>로 <현현의 확장>을 상징한다. 그것은 <본래적이고, 감내(堪耐)하는 상태>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특정한 처소에 관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쉬바는 히말라야의 카일라사 산에 산다.”는 것 등) “그”의 경우에는 어떤 제한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특정 장소(공간)를 지정하는 것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질문과 대답>의 사실은, <질문>과 <그 대답>의 구분이 없는 파라 바크의 수준에서는 늘 현존하는 실재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한 의미의 전부다. 모든 존재의 자연적인 상태인 참나는 자기 조명적이고, 자신과 다르지 않은 <질문―대답>으로 즐겁다.
그 안에서는 질문자(데비)와 대답자(바이라바) 둘 모두가 그 자신인데, “나”로서 다음과 같이 비춘다. “나, 나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아는 놀라운 기쁨 때문에 <질문과 대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경전(經典)은 처음에는 “데비가 물었다. 쉬바여! 아눗타라가 어떻게……”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바이라바가 답했다. 들어라, 복(福)을 받은 자여!……”라고 하고,
그 마지막은 “이런 것이 루드라―야말라이니 ― 쉬바와 샥티의 합일이니 ― 이를 수행하여 <전지(全知)의 힘>을 얻노라.”로 끝난다.
<다섯 근원에서 나온 모든 경전>에서부터 <세속적인 (거래) 관계>까지, 이 모든 것은 <지고의 관계(파라 삼반다)>라고 말한다.
(<다섯 근원>은 27절의 설명을 참조하라.)
나 아비나바굽타는 비밀인 <질문―대답> 양상의 감춰진 부(富) 전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쉬바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가르침의 핵심이고, 또 항상 자신을 <바이라바의 상태>의 경험으로 이끈다.
이제 학생들(배우려는 이들)을 위해, 시(詩)로써 모든 가르침을 요약한다.
모든 거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지식의 일이든, 행위의 일이든
일어나는 모든 것은 <네 번째 상태>
분화(分化)하지 않은 파라 바크에서라네
연속의 순서로 처음인 파쉬얀티에서는
단지 <다양성(多樣性)의 싹>만 있고,
마드야마에서는 지식과 행위가 내적이라
명확한 연속(連續)은 있을 수 없노라
파라에 의존하는 마드야마와 파쉬얀티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 상태를 과거(過去)처럼 여기노니
파라는 구별이 없는 늘 현재(現在)로다
더 없는 것의 이 상태는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제>와 <제목>, <관계>, <목적>으로.
똑같은 것이 소마난다의 주석에도 있[는데, 나는 그 주석의 난점(難點)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항상 다섯 행위를 하려는 바이라바의, ‘데비가 물었다’의 형태에서, 에너지의 첫 박동 후에……”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다. 이제 우리는 <주제(제목, 아비데야)>를 다루려고 한다.
[<경전(經典)에서 필수 요소>는 ① 프라요자나(목표), ② 아디카라(자격), ③ 아비데야(주제), ④ 삼반다(관계)의 네 가지다.]
“트리쉬카”는 <셋의 이쉬카>라는 뜻의 복합어다. 그 셋은 <잇차(의지), 갸나(지식), 크리야(행위)>를 가리키지만, 물리적인 면과 관련해서는 <스리슈티, 스티티, 삼하라>를, 영적(靈的)인 면과 관련해서는 <우됴가, 아와바사, 차르와나>를 가리키기도 한다.
[<스리슈티 등>은 다섯 가지이다. 즉 <스리슈티, 스티티, 삼하라, 빌라야(티로다나, 피다나), 아누그라하>이고,
또 <우됴가 등>은 <우됴가(아바사나, 나타남), 아와바사(락티, 즐김), 차르와나(비마르샤나, 알아챔), 비자―아바스타파나(씨앗을 뿌림)과 빌라파나(용해, 발아)>이다.
이 부분의 설명은 프라탸비갸 흐리다얌(11절)을 참조하라.
이것을 셋으로 분류하면, 빌라야와 아누그라하는 삼하라(소멸)에 포함되고, 또 비자―아바스타파나와 빌라파나는 차르와나(알아챔)에 포함될 것이다.]
“이쉬카”는 <이슈와리(여신)>를 말하며, 셋을 ― <잇차―갸나―크리야>, <스리슈티―스티티―삼하라>, <우됴가―아와바사―차르와나>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여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샤나”는 <다스려지고 통제되는 것>과 동일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파라 샥티(지고의 신성의 의식)”가 ? 그녀는 즉시 셋의 구분을 초월하고 또 그것과 동일하다. ― 이 책의 주제다. 파라 샥티의 “파라”와 “셋(트리)의 이쉬카”가 합하여 책의 제목이 “파라 트리쉬카”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뜻으로 “삼위일체경(三位一體經)”이란 부제를 달았다.]
트리쉬카의 다른 읽기로는 트림샤카가 있다. <세 가지 샥티(힘)를 ‘말하는’ 그것>이 트림샤카이다. <30절(節)>과 관련되는 트림쉬카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절의 수(數)가 아니고, 트림샤카의 의미다. 어떤 경전은 말한다. “트림샤카의 뜻은 수천수만의 절(節)에서 선언되었다.”
<책의 제목>과 <주제>의 관계는 지고의 관계다. 둘 다, <동일한 실재(實在)>와 관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강조한 것이다.
이 경전의 목표(프라요자나)는 <모든 경험자들의 ― 샥티의 하강으로 은혜를 받아, “더 없는 것”의 지식이 허여(許與)된 경험자들 ― 살아 있는 동안의 해방>이다.
이 해방 혹은 자유는 <바이라바의 본성 안에서, 완전한 정체성의 확립>과 <나의 기쁨의 번쩍임인 나―의식과의 통합>을 포함한다. 또 그것은 자신의 본성(本性)을 실현하여 <속박이라고 상정된 존재계 전체 범주>를 그의 놀이로 여기는 사람의 성취다. 놀이는 단지 <그의 기쁨의 풍부함의 표현>이다.
보통, 해탈을 <속박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 <몸, 프라나, 푸랴슈타카에서 살아가는 개아들을 ― 그의 활동 영역은 내적인 감각과 외적인 감각이고, 몸 등은 충동(衝動)으로 있고, 그 삶은 몹시 힘든 노력으로 구성된다. ― 구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묵티(해방)는 <이 존재계의 범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라바의 본성과의 동일성>을 말한다. 다른 말로, <나 자신의 본성인 나―의식과의 동일성>을 말한다.
그리고 충동(衝動)은 모두 우리를 불행으로 몰고 간다는 말이 아니다. 단점(短點)은 개아가 더 높은 삶으로 오르려는 자극으로 작용한다.]
만약 <마야로 인한 모든 다양성의 인상>이 사라진다면, 그런 자유의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무엇과 관련한 자유인가?
스판다 카리카는 말한다.
<이런 깨달음>을 가진 자는
끊임없이 신성(神性)과 연합하여
세계 전체를 <자신의 놀이>로 본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해방되고, 의심은 없다.
이것은 곧 명확해질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 “<나>와 <바이라바의 나―의식(意識)>은 똑같다!”― 이 경전의 목표를 구성하고, 또 이 목표는 <인간의 목적>의 절정이다. <목표의 목표>에 대한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관계>, <주제>, <목표>를 논의했다.
[아비나바굽타는 이 경전의 ① 목표는 묵티 즉 자유라고 한다. 그는 <참나의 ‘탈것’에서 벗어남, 존재계 범주에서의 해탈>이라는 대중적인 생각을 일축하고, <나>와 <신성의 나―의식>과의 동일시를 견지한다.
그는 ② “아디카리”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고 암시만 한다. “<은총으로, 주께로 향한 자들> 만이 이 경전을 공부하기에 적합하다.”
③ 주제는 “나로서 항상 번쩍이고, 파라 바크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신성의 의식> 즉 <지고의 샥티>”라고 하며,
④ 관계에 대해서는 “<주제>와 <책>의 관계는 <지고의 관계>다. 둘 다 <동일한 실재>와 관련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아비나바굽타는 스왓찬다 탄트라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크세마라자는 그것을 주석한다.
사다―쉬바 자신이 스승과 제자의 위치를 떠맡고
<질문>과 <대답>으로 탄트라를 드러내도다.
“<지고의 말>의 힘을 가진 주는, 사다―쉬바로서 <질문자>와 <대답자>의 수준을 떠맡는다.
스승과 제자의 위치는 ‘창조적 통찰의 영역에서’ 구절에서 설명된다.”
아비나바굽타는 탄트라 알로카에서 위 스왓찬다 탄트라 구절을 재미있는 말로 표현한다.
“의식은 그렇게 스승과 제자의 위치에서 질문과 대답이 된다. 그 몸의 차이는 실질적이 아니다.”
자야라타는 그것을 또 이렇게 주석한다.
“스승과 제자의 차이는 <직접적 인식의 문제>가 아닌가? 어디가 의식의 본성(과 단일성)의 곳인가?
(이 반론에 대답하여) 이것은 실질적이 아니고, 실제가 아니다. 의식(意識)은 그의 <절대 자유>로, 이들 다른 몸들을 그 자체 안에 나타나게 한다.”
<경전의 계시(드러남)와 하강의 과정>에서, 다른 종류의 관계가 있다. <신성>으로부터 <인간 스승과 제자의 수준>까지의 하강 말이다.
스왓찬다 탄트라에서 <사다―쉬바와 이슈와라의 관계>를 신성 수준에서의 <구루와 제자의 관계>로 다룬다. 사다―쉬바는 갸나(지식)의 면을 나타내고, 이슈와라는 크리야(행위)의 면을 나타낸다. 이것은 “위대한 관계(마하 삼반다)”에 해당한다.
여기 파라 트리쉬카에서 아비나바굽타는 데비와 바이라바의 최고의 관계(파라 삼반다)를 발견한다. 그것은 <역동적인 불이(不二)의 관계>다.
(인용문 중에는 미리 인용하는 것이 더러 있다.)
“바이라바는 그의 안에 우주의 확장 전체가 포함되어 영원한 응답자로서 거한다. 확장과 회귀라는 과정은 시간 너머여서, 이 <질문―대답>은 한결같은 본성의 진리이다.
이것이 아눗타라와 관련되는 파라 삼반다이다. 나의 스승 샴부나타는 그것을 트리카 경전(經典)의 골자와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불이(不二)의 대화(對話)>의 맥락에서 “질문”의 궁극적 의미를 다룬다.
“(신성의) 지고한 <의식의 힘>은 그녀의 본성에 따른 확장의 찰나에는 바이라바와 다르지 않은데, 잇차 샥티(의지의 힘)라고 한다.
그녀의 실제적인 확장은 갸나 샥티(지식의 힘)로 파라―아파라 혹은 파쉬얀티 형태를 떠맡고,
또 크리야 샥티(행위의 힘)로 아파라 혹은 마드야마와 바이카리 형태를 떠맡는다.”
“<우주 형태로 확장된 파라―샥티>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질문>이라고 한다. 바로 그 샥티인 데비가 <그녀 자신(파라 샥티, 파라 바크)>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는 자다.
이 <확장의 성격에 대한 심사숙고(深思熟考)>가 <가장 우수한 언설 기관(파라 박트라, 좋은 입)>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된다.”
데비가 물었다.
<불이의 문제>에서 일어난 “데비가 물었다.”에 관련된 것을 아비나바굽타는 여러 가지 수준에서 해결하였다. ― 문법적으로,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왜냐하면 데비의 질문에 따른 탄트라 전체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이기 때문이다. 지반 묵티 즉 <살아 (숨 쉬고) 있는 동안의 자유> 말이다.
그것은 데비와 바이라바의 <최고 관계>의 접점이자 역동성이고, 최고 수준에서의 <질문―대답>의 역동성이다. 또 그것은 <우리 인간 제자>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일인칭의 데비가 질문한 것으로 확립되면, “그러므로 <인식(認識)의 힘(갸나 샥티)>에서는 <신성의 나―의식의 가장 높은 만트라 에너지>의 실제적인 경험이 있다.”
전체적 의미는, 비록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의 (신성의) 주체만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계(關係)”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은혜(恩惠)의 힘(아누그라하 샥티)>과 <창조성(創造性)의 힘(비사르가 샥티, 곧 쉬바의 편에서)> 사이의 최고의 관계이다.
“이것은 <현현의 느낌이 가득한> 바이라바의 저 <관찰이 불가능한 면(즉 샥티)>이다. 그것의 핵심은 능가(凌駕)할 수 없는 나―의식이고, 쉬바와 샥티의 결합으로 생긴 동요(動搖)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트리카 전통(의 철학과 실천)에 따르면, 쉬바는 <a>로 <출현의 근원>을, 또 샥티는 <?>로 <현현의 확장>을 상징한다. 그것은 <본래적이고, 감내(堪耐)하는 상태>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특정한 처소(處所)에 관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경우에는 어떤 제한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특정 장소(공간)를 지정하는 것은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이 책의 <제 2 부(5절부터 끝까지)>라고 할 수 있는 5절로 들어가기 전에 아비나바굽타는 질문에 대한 요약을 주고 그것을 “트리카(삼위(三位))”와 관련시킨다.
<아눗타람 카탐(아눗타라가 어떻게)>으로 시작하는 1절의 데비의 질문은 삼위 중 “쉬바”와 관련되고,
<흐리다야―스타(가슴에 있는)>로 시작하는 2절의 질문은 삼위 중 “샥티”와 관련된다.
그다음 <제 2 부>는 삼위 중 “나라”와 관련되고, 그것은 웃타라 즉 <(거울 속의) 영상>에 해당하며, “나라”의 모든 면을 아우른다.
그러나 대안적인 것은 야말라와 관련된 두 가지 질문이다. “<쉬바와 샥티의 결합>이 (곧) 야말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각각에 대한 분리된 질문은 정당화될 수 있다.”라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4 장> 가슴에서 다룰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나가며
참고로, 이 책은 냐야 샤스트라에 따른 완전한 논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라탸비갸 흐리다얌에서 다루었다. 복습(復習)하자면
“1) 프라티갸(주장) : 산에 불이 났다.
2) 헤투(이유) : 연기가 난다.
3) 우다하라나(예) : 아궁이에 불을 땔 때
4) 우파나야(적용) : 산에 연기가 난다.
5) 니가마나(결론) : 산에 불이 났다.”
라는 것 말이다.
<아눗타람 카탐 데바 …… 브라젯(쉬바여! 아눗타라가 어떻게 …… 얻습니까?)>은 프라티갸 즉 <주제의 총론>이고,
중간의 절들은 헤투(논리적인 논거), 우다하라나(예)와 우파나야(적용)를 이루고,
35절과 36절(이 책 삼위일체경 『파라 트리쉬카』에서는 36절과 37절)은 니가마나(결론)이다.
오래 전, 아내와 대구의 <두류 공원(頭流公園)>을 산책하던 때의 일이다. [두류는 <머리가 (떨어져) 흐른다>는 뜻이다. 친나마스타……?!]
여름 저녁이었던 듯, 갑자기 소나기가 시작됐고, 아내는 비를 맞지 않으려고 걸음을 서두르며 나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나>를 보고, 아내는 짜증을 냈다.
‘옷이 젖고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하는…….’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하니> 이 마음이 급해지고 몸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그러나 <비를 (그냥) 맞으려고 한다면>, 마음이 움직일 일도, 걸음(몸)을 서두를 일도 없다.
비와 바람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비유다. “아날로기아 엔티스”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몇 줄기 소나기든, 모진 풍상(風霜)이든……
가리지 않고 또 회피(回避)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서두를 일은 없다.
갑작스런 <죽음의 비>일지라도 <정면으로(face to face, 삼-무캬)> 맞으려고 든다면 -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면……
우리는 내 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고, 그리고 또 언제라도 내 마음(생각, 말)이 죽어가는 것도 지켜보며 이번 생(삶)을 유희(遊戱, 逍遙遊, 놀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