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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세계의 종교 > 기타 종교
· ISBN : 9791185062525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25-08-17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 6
제 1 부
<신(神)을 아는 일>은 가능한가? · 13
제 2 부
이슈와라-프라탸비갸 카리카 · 29
제 1 편 지식(知識)편
갸나-아디카라 · 31
제 1 장 서론(序論) (5절) · 33
제 2 장 일견(一見)의 반론 (11절) · 51
제 3 장 일견에 대한 반박 (7절) · 87
제 4 장 <기억(記憶)의 힘> (8절) · 105
제 5 장 <인식(認識)의 힘> (21절) · 127
제 6 장 <배제(排除)의 힘> (11절) · 191
제 7 장 <유일한 기초(基礎)> (14절) · 221
제 8 장 주의 특성(特性) (11절) · 259
제 2 편 행위(行爲)편
크리야-아디카라 · 281
제 1 장 <행위(行爲)의 힘> (8절) · 283
제 2 장 <다양성 안의 단일성> (7절) · 299
제 3 장 <올바른 ‘지식의 수단’> (17절) · 313
제 4 장 인과 관계의 본질 (21절) · 357
제 3 편 계시(啓示)편
아가마-아디카라 · 403
제 1 장 탓트와(범주) (11절) · 405
제 2 장 주체의 본질 (20절) · 429
제 4 편 요약(要約)편
탓트와-상그라하-아디카라 · 471
제 1 장 요약(要約) (18절) · 473
나가며 · 505
저자소개
책속에서
들어가며
이 책의 집필은 『돌과 즈 이야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루던 중 <기억(記憶)>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시작되었다.
꿈의 어떤 예시(豫示)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잖게 여기다가 다시 “꿈의 잔”을 듣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고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주의(注意)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던 것 같다.
주(主)만 바라보아야……
결과적으로 『돌과 즈 이야기』와 이 책의 출판 순서도 바뀌었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 카리카』는 웃팔라데바의 저작으로, 프라탸비갸 학파의 시조인 소마난다의 쉬바-드리슈티와 더불어 아주 중요한 경전이다.
유명한 <프라탸비갸(재-인식) 학파>라는 명칭은 바로 이 책의 제목으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 카리카(IPK)의 주석으로는 저자 자신이 쓴 것은 두 가지로, 짧은 것은 카리카와 동시에 쓴 이 책에 소개되는 브릿티(vṛtti)이고, 아주 긴 것(8,000 절)은 나중에 쓴 비브리티(vivṛti 혹은 tika)라고 하는데 상실되었다고 하며, 최근에 그 일부(I,3:6 – 5:3)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후 아비나바굽타가 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비마르쉬니(IPV)와 <이슈와라-프라탸비갸-비브리티-비마르쉬니(IPVV)>가 있다. (IPV는 필자가 다음에 그럭저럭 다루겠지만, IPVV는 이후 누군가 다루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The Īśvarapratyabhijnākārikā of Utpaladeva with the author’s vṛtti- critical edition & annotated translation Raffaele Torella 지음
2, Pratyabhijna Karika of Utpaladeva R. K. Kaw 지음 (pdf 파일)
3. The Ubiquitous Siva vol I, II - 소마난다의 쉬바-드리슈티 John Nemec 지음
그리고 크세마라자의 『프라탸비갸 흐리다얌』은 아마도 이 책 등의 <요약의 요약>일 것이다.
필자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성경의 <신(여호와 하나님) 인식 경험>에 대한 장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모세가 이르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磐石)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磐石)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질문(요구)은 하나로 간단한데 신의 대답(설명)은 여럿으로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 우리의 신 인식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약간의 푸념(넋두리)을 하자.
‘주의 영광’이라는 그 ‘얼굴’을 그냥 보여주면 될 일일 것 같은데…… (아마도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견해 내지 입장일 것이다.) 또 신은 모세의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고 하고……
더구나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며 겁이나 주고…….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어떤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설명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웃팔라데바도 카리카(수트라)에다 브릿티, 비브리티로 긴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위의 성경에서 신이 허여(許與, 허락)하는 몇 가지 힌트를 얻는 것에 일단 만족하자.
신은 우선 ‘신(神) 곁(가까운 데)의 한 장소(場所, 곳)’를 가리킨다.
이 장소는 물론, <물리적인 장소>로만 볼 필요는 없다. 이 장소는 곧 ‘반석(磐石)’으로, 반석에 대한 의미는 성경에서는 아주 뚜렷하다.
먼저 아주 잘 아는 구절, 예수가 했다는 말,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리고 유명한 찬송과 그 설명,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구원자)시라.”
신 곁의 한 장소, 신 가까이에 있는 반석 같은 존재 혹은 무엇……
성경은 말한다.
“그 위에 서라.”
필자는 말한다.
“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반석 위에 서라.”
그 다음은 은혜다. 순전히 신의 은총이다.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磐石)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磐石)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필자는 그저 눈시울을 붉히며, 반복하고 반복할 뿐이다.)
“내가 너를 반석(磐石)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주의 은혜가, 은총이 있다면, 우리는 이 <신(神) 인식(認識)>경(經)의 어떤 틈에 두어질 것이고, 또 주의 (은혜의) 손이 우리를 감쌀(덮을) 것이다.
그리고 손을 거두리니 ‘주의 얼굴을 보는’ 아누파야는 아니라도 ‘주의 등을 본다’는 샥토파야……. (아누파야, 샥토파야 등은 이미 여러 책에서 다루었고, 더 다룬다.)
“필자는 말한다.
‘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반석 위에 서라.’”에 대해서 한마디.
사실, ‘주의 영광’을 ‘쉐키나’나 ‘빛’으로, ‘주의 이름과 얼굴’을 ‘본질’, ‘본성’ 등으로 풀고 몇 마디 주석을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겨우 소위 <우리의 지식> 몇 가지가 더 늘어날 뿐이다. (이런 것이 <기독교 신학의 상황>이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는 바로 이 내 안에서 시작한다. 바로 이 ‘내 안의 신성을 찾는 길’이다. 또 빠른 길이다. 그리고 누구나 ‘기억’을 알고 또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기억’에서 시작한다. (아주 쉽다.)
그것이 필자가 “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반석 위에 서라.”는 이유다.
제 1 장 요약(要約) (18절)
쉬바에게 절하노니 그는 헌신자들의 자아를 현현하누나 <무수한 ‘지식의 수단과 대상’을 지닌> 하나로 자아는 본질에서 지고의 주와 동일하다. 이것은 자기-경험, 이성(합리적 이유), 아가마로 증명된다. 이제 아가마의 내용의 요약(要約)을 열여덟 절로 구성되는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 1 >
<모든 창조물의 바로 그 “나”>는 마헤슈와라로, 하나이고, 그의 형상은 만유(萬有) 곧 전체이며, <나누어지지 않은 의식 “나-이것(아함-이담)”>으로 가득 차 있다.¹
<‘나눠지지 않은, 지각하는 주체’와 또 ‘나눠지지 않은, 지각할 수 있는 대상’과 또 ‘그 둘의 융합’을 맛보는 일(차맛카라)로 가득하고>,² <우선 추구해야 할 ‘네 번째 상태’에서는,³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공통인 자아(나)이고, 그의 형태는 모든 것(전체)인 자(“하나”님)>는 마헤슈와라이다.
✍ 이 경문을 판데이는 이렇게 번역한다.
“<하나인(하나님인) 지고의 주> 홀로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바로 그 자아(‘나’)이다.
그는 ‘나는 이 우주 전체다.’라는 끊임없는 의식으로 가득하다.”
¹ 이 번역은 카리카 본문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판데이의 번역은 깔끔하고, 판디트의 번역도 좋다.
브릿티의 더 복잡한 표현은 아함-이담이라는 두 용어를 우선은 분리하여 그다음은 함께 고려하는 것 등 때문이다.
² 아비나바굽타가 설명하듯이,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주체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지각하는 주체’에 대한 성찰적인 자각>을, 즉 <명백한 분절 아래에 있는 ‘주체의 근본적 단일성’에 대한 성찰적 자각>을 갖는다. 똑같은 것이 대상에도 적용되고, 마지막으로 ‘주체와 대상의 궁극적인 비(非)-타자성(멜라나)에 대한 자각’을 본다. (이 브릿티 부분은 참맛을 찾아에서 라스토기의 해석도 참조하라. 토렐라는 차맛카라를 긴 구절의 세 가지 요소에 각각 연결하고, 라스토기는 각각을 아함, 이담, 아칸다마르샤에 대한 설명으로 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³ 이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얼룩(盲目)이 용해되기 때문이다.
< 2 >
거기서(타트라), <(주에 의해) 자유롭게 창조된 “이것”의 영역에 포함된 마음 등의 실체>는, 그가 <허구의 나(아함카라)>를 ‘지각하는 주체’인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 우주가 ‘지고의 주의 자유로운 확장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나며,¹ <성찰적 자각 “이것”의 영역에서 지각의 대상으로 - 마음, 호흡, 공(空) - 창조된 실재들>, 정확히 이 실재들은, <알 수 있는 것(대상)>의 한 부분을 나타내는데, <허구의 나>로 여겨지는 원인이고, 이것이 강력하여² <제한된 지각하는 주체>로 변형된다.
✍ ¹ 본문의 모호함은 카리카의 타트라에 대한 이중 해석(탄트라) 때문인 것 같다(토렐라도 일부러 모호하게 번역했다고 한다).
아비나바굽타는 그의 두 주석에서 마헤슈와라를 언급하며 타트라의 동시적인 ‘이중 기능’을 따른다.
“마헤슈와라는 ‘자아(나)’이고, <‘이것’ 부분>은 <그 자신으로 구성된 기층(基層) 위에 그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첫 번째 경우의 타트라는 사티가 이해되는 절대 처소격이고, 두 번째는 스와스리슈타에 따른 처소격이다.)
²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거기에는, 인간의 내면(內面)에는, “의식(意識)이 있다. 아니면 <텅 빈 것>, 아트마만이 거기에 있다. 본시 내면에 이 <나>는 없다.
그런데 의식(의 주변)에 지식, 경험, 기억이 축적된다. 그것이 마음이다. 그것은 꼭 필요한 것으로, 그것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 거기에 어떤 부수적 현상이 일어난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그 기억을 통해서>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할 때는 <그 지식을 통해서>, <그 경험을 통해서>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그렇게 하면 그것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의식이 기억 등과 동일시된 것>이 에고이고, 우리가 흔히 <나>라고 하는 것이다.”
< 3 >
<많은 것으로 여겨지는 개별적 주체들>은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인식하지 못한” 즉 <재(再)-인식이 없는> 결과이다. 그들 안에는 행위와 행복이 창조되는데, 즉 즐거움과 고통이 그 특징인 열매다.¹ 그것은 정확히 <‘그의 본질이 모든 것인 그것’에 대해 “비(非)-재인식”이라고 부르는, 제한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호흡 등과 같은 ‘다중이고 파편적인 실체’에 기인한 ‘제한된 주체성’에 대한 자각>은² <‘지고의 주체성에 대한 완전한 지식’의 부재>라고 부른다.
개별적 자아는 많다. 아는 주체로 나타나는 그들 안에서, 마헤슈와라는 자신의 행복과 활동을 창조하며, 그것은 <유일의 진정한 행위성> 안에 내재한 그들 자신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열매인데, 그것이 (신성의) 지복의 입자로 구성되기 때문이고, 또 고통인데, 그것이 (신성의) 활동의 극미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활동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설명될 것이다.
✍ ¹ 그러므로 <주가 여러 제한된 영혼에게 떨어뜨린 결실의 능력>은 그가 창조한 행복과 활동의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반면에 그에게는 내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칼피타(만들어진 것)이다. 행복과 활동은 갸나와 크리야 샥티, 프라카샤와 비마르샤와 다른 것이 아니다.
² 아비나바굽타는 ‘긴 뱀(고나사)’의 예로 이것을 설명한다. 그것의 몸은 단일한 생명(지바트바)으로 편재(遍在)하지만, 그것이 조각날 때, 동일한 뱀의 개별 부분에 활기를 주는 <여러 구별되는 부분의 생명력>으로 나눠질 수 있고, 또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생물로는 플라나리아가 – 두 조각이 나도, ‘조각난 부분’이 다시 ‘완전한 성체(成體)’가 된다는 점에서 - 고나사와 비슷할 것이다. 어릴 적 배운 ‘불가사리’도 생각난다.] 잘 아는 대로, ‘공기(대기)’와 ‘(바다)물’은 그릇(容器)에 나누어(?) 담을 수도 있다.
< 4 >
제한된 주체에서 삿트와, 라자스와 타마스는, 주 안에서 지식, 행위와 세 번째로, 마야에¹ 상응한다. - 그에게는 사물이 그 자신의 몸을 나타낸다. 주의 지식과 행위는 마야와 함께, 제한된 주체의 삿트와, 라자스와 타마스가 된다.
✍ ¹ 마야의 힘은 사다-쉬바-이슈와라 국면에서 의식에 이단타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크리야 샥티의 확장이다. 즉 실제로 아비나바굽타의 말에 따르면, 삼하라의 우세함 대신 - 스리슈티는 갸나 샥티에서 우세함 - <순야타(空性) 혹은 니셰다가 우세한 것>은, 즉 <주체와 대상의 상호 구분(결정)>은 크리야 샥티 그 자체이다.
이 마야의 힘은 쉬바에게 속하지만, 위 카리카의 공식이 가리키듯이, 그것은 분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식과 행위의 힘>과 똑같은 국면에 있지 않다.
이 절은 여러 책에서 다루고 있다. 먼저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5절에서 “쉬바의 갸나, 크리야, 또 <제 3의 힘> 마야는, 파슈 즉 지바에서는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로> - 쉬바 자신의 수족(手足)과 같은 대상적 실재로서 – 나타난다.
<절대 자유이면서, 갸나, 크리야, 마야의 힘을 갖는 의식>은 제한(制限)이 과잉되어, <그 성격이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인 파슈 즉 칫타(마음)>로 나타난다.”
스판다 카리카 1:19에서
“주(主)의 경우에서 [그의 사지(四肢)인 <대상적 실재>에 대해서] <갸나> <크리야> <마야>인 그들 힘은, 제한된 개아의 경우에서는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로 나타난다.”
파라 트리쉬카에서(388쪽)
“<그와 동일한 대상들과 관련하여 주의 지식과 행위로 인정되는 무엇>, <제 3의 것과 함께 똑같은 것>, ‘마야’는 제한된 주체의 세 가지 구나다. 즉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
< 5 >
분화의 상태 때문에, 기능(능력)과 산물로 변형된 이런 성질(구나)은 <‘그것들의 소유자인 어떤 주체’에게 내재한 힘>으로 여길 수 없다.¹
삿트와, 라자스와 타마스는 (주체로부터) 별개로 나타나기 때문에, 힘이라는 용어는 <‘힘(샥티)’과 ‘힘의 소유자(샥티만, 쉬바)’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모든 것은 힘(들)의 확장이다.² ......
< 12 >
<모든 것을 자신의 본질로 갖고 “이 모든 다양한 전개는 내 것이다.”고 그렇게 아는 자>는 정신적 구성물의 흐름 속에서도 마헤샤의 상태를 얻는다.¹또한 개별적 주체는 – 그는 정확히 주의 힘에서 파생된 정신적 구성물을 계속해서 산출하더라도 – 그 자신의 본성을 주라고 완전히 알아채게 되고 – “삼사라(윤회계)의 이 다양한 전개는 내 것이다.” - 이 주체 역시, <어떤 분화도 없이 우주로 스며들고 또 모든 정신적 구성물을 순수한 성찰적 자각으로 변형하는데>, 마헤슈와라의 상태를 얻는다.
✍ ¹ 앞 절에서는 비칼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니르비칼파(중심, 삼빗)에 고정하는 것으로 비칼파를 억압시켰으나(<생각의 용해>), (- 이것은 샥토파야 수행이다.)
여기서는 반대로, 의식의 전체성(全體性)의 영역에서 그것을 포함하(고, 변형하)는 것(방법)을 가르친다. (- 이것은 샴바보파야 수행이다.)
이 카리카(수트라)는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12절 <샴바보파야 수행> 부분의 주석에서 다루었다.
“‘<이 모든 현현의 영광>은 <나의 것>이다.’라고 알고, <우주가 그의 참나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비칼파 즉 마음 혹은 생각이 그 놀이를 할 때라도, 마헤샤타를 소유한다.”
마헤샤타는 마헤샤의 추상명사이고, 마헤샤는 “위대한 주”로 쉬바를 말한다. [“쉬바성(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