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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7077275
· 쪽수 : 228쪽
· 출판일 : 2020-03-20
책 소개
목차
추천사 _4
머리말 _12
1. 어느 순례의 길로
자연의 소리 _16
첫 만남 _18
나는 왜 하느님을 믿는가? _22
가을날의 수채화_29
경제적 자유 _33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_36
가을날의 산행 _40
마음의 중심 _44
백약이 무효 _51
운명이란? _57
여정의 동반자 _65
이 또한 지나가리라 _68
눈이 오려나? _71
갑천의 생명들 _76
2. 이름 모를 광야에서
아이들 어린 시절 _82
버려진 질그릇 _90
행복한 얼굴 _96
벽에 붙어 버린 아이 _100
꽃샘추위 _107
자퇴한 아들과 나 _110
회한 _118
주치의 같은 막내 _123
그리움이 깊어 아픈 날 _132
보고 싶은 할머니 _136
용궁의 왕자 _140
안개 속 아이들 _143살아있음에 놀라움 _153
총성 없는 전쟁터 _165
광주엔 전운이 _173
부르고 싶은 이름 _175
3. 집으로 가는 여행
트라우마 _184
기절초풍 한 일 _191
싱싱한 빨간 고추 _206
나는 왜 글을 쓰는가? _210
감 따러 가는 날 _218
파랑새는 돌아왔다 _220
책속에서
스물한 살에 요한을 만나 4년을 사귀었고 스물다섯 살 2월에 약혼식을 했다.
그날 밤 같이 있자고 술기운에 졸라서 따라갔는데 임신이 되어버렸다.
결혼식은 겨울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며 요한은 친구들도 많이들 한다면서 낙태를 하자고 했다.
나이도 나보다 네 살이나 많고, 좋은 학교도 다니고 있고, 무엇보다 남자라
서 아주 똑똑한 줄 알았다.
난 순진했고 수동적이었다.
막연하게 뭔가 불안했지만 그냥 그 말에 따랐다.
낙태란 나의 필요에 의해서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 땐 동네마다 산부인과가 있었고 아무데서나 쉽게 할 수 있었다.
아, 그러나 하늘이시여!
낙태를 하고 이틀 후에 하혈을 해서, 산부인과를 두 군데를 옮겨가며 지혈이 되었지만 몸은 이상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발가락부터 관절들이 아파왔고 여름이 되어도 추웠다.
낙태하기 전에 양가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라면 그런 우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였으니까 어른들과 상의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혼자서 한의원으로 병원으로 다니면서 치료를 해봤지만, 몸은 회복이 되질 않고 점점 악화되어 갔다.
1년 후에 혈액검사를 했는데 류마티스 관절염이라 하면서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라 했다.
나는 불가능이란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력하면 좋아지겠지 생각하고 한약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나와 갑천과의 인연은 4년 전 여름이다.
아파서 거의 15년 동안 주일미사만 드리고 집 밖을 나와 보지 못하다가,
자전거 타고 나가는 막내를 따라 처음으로 갑천에 나왔던 날,
하늘과 바람과 생명의 땅에서 울리는 동화 같은 자연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잊힌 과거가 환생을 하듯 자아를 상실해 버린 가슴으로 빛이 들어왔다.
숨을 쉬고 살아있음이 실감났고, 갑천은 그 어떤 친구보다 가까운 벗이 되어 갔다. 집에 있으면 풀과 꽃과 새들 그리고 강물이 눈앞에서 삼삼하게 보였다.
“과거를 사는 사람은 우울감에 살고 미래를 사는 사람은 불안 속에서 살며 현재를 사는 사람은 행복 속에서 삽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을 사람 하나도 없으니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사세요.”
이 말씀은 또렷하게 들렸다.
아, 미래에 대한 공포.
관절이 아파 몸이 점점 변형되어 갈 때, 통증보다 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을 땐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불안을 견딜 수 없어 온갖 미친 짓을 다해버렸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이제야 알았다.
순간의 난제들만 바라보고 해결하면서 기쁨과 행복이 동행하길 빌어본다.
그 어리석은 깊은 늪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울창한 산속을 휘도는 진하고 강한 측백나무 향이 신비롭다.
측백나무 잎을 뭉개서 코앞에 들이민 것만 같다.
잠자는 세포와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눈길 머문 곳마다 아름드리 커다란 나무 둥지들도 보인다.
차디찬 눈보라와 모진 바람에 젖은 세월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