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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7413981
· 쪽수 : 152쪽
· 출판일 : 2019-04-20
책 소개
목차
제1부 거미에 기대어
대건성당·13
제비꽃이 감리한 집·14
골똘한 비둘기·16
꿀렁꿀렁 발을 굴리는,·18
화명수목원·20
무엇에 대한 증서로·22
비둘기와 쥐와 지네 그리고·24
옹기마을에서·26
돈 생각·27
거미에 기대어·28
먹물 묻은 손·30
뚱보식당·31
베데스다병원·32
볼록거울 두 점·34
장날·36
숲속의 고물상·37
유등축제·38
제2부 쓸쓸한 날들의 기록
누군가는 더 크게 울고·41
우리끼리 좋아도,·42
추석 무렵·44
오래된 시장·46
가을 경주·48
텃밭에 다녀오다·50
속성으로,·52
쓸쓸한 날들의 기록 4·54
쓸쓸한 날들의 기록 5·56
쓸쓸한 날들의 기록 7·59
쓸쓸한 날들의 기록 17·61
쓸쓸한 날들의 기록 18·64
쓸쓸한 날들의 기록 22·67
어촌 까페·68
울산횟집·69
교육설명회·70
주말·72
제3부 정희네 집
화제 이야기·75
꽃들이 저물고·76
지원에게·78
사랑이 넘치는 유안이·81
마을길·82
봄·84
소희 일기·86
범진이·88
준영이 화분·89
강낭콩·90
어린 스승·91
종이로 만든 나라·92
유치원에서 생긴 일·94
시를 쓰는 시간·96
장마·98
정희네 집·100
구언이·102
제4부 하늘을 붕붕 날다
관광버스·105
태종대·106
말복·108
하늘을 붕붕 날다·110
느닷없는, 죽음·112
연대(連帶)·114
이 겨울 최대의 뉴스는 겨울·116
안개책·118
압록강에 배 띄우다·120
박춘근 씨·122
야간열차·123
이도백하·124
부족하면 죄책감이, 넘치면 주체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바로 그것·125
심폐소생술·126
머리카락 꼬실리는,·128
새롭고 따뜻한 날·130
화단에서·132
해설 시의 ‘가치’ 혹은 ‘같이’의 시 / 김남호·133
저자소개
책속에서
거미에 기대어
--
엄마집 천장을 가득 메운 거미줄
천장과 벽이 만나는 솔기에 실밥처럼 너덜너덜 붙은 거미줄
엄마집은 거미가 부족(部族)을 이루었다
거미의 엄마, 거미의 아빠, 거미의 할아비의 할아비까지 죄다
엄마집에 모여 엄마 숨결을 나누며 살고 있다
나는 붉은 플라스틱 의자를 딛고
거미줄을 치우다가
살아 있는 거미를 만나기도 하고
죽은 거미를 만나기도 한다
거미는 비쩍 마르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벌레대신 엄마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먹고
살았을 것이다 그것마저 없는 날엔
낡은 벽지를 갉아먹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통이 저렇듯 벽지 색깔과 일치할 수 있겠는가
도망도 안 간다
가느다란 다리로 빈약한 몸통을 지탱하고
허술한 유모차에 기댄 노인처럼 간신히 서 있다
제 집을 철거하는데도 가만 보고 있다
가끔 엄마가 먹는 국그릇이나 물컵에 스며들어가기도 했을 거미, 거미줄
엄마가 성모마리아 앞에 기도할 때
같이 고개를 조아리고 여덟 다리로 성호를 그렸을 거미
-
독거와 거미 사이
뜯어진 외로움의 솔기마다 바늘 같은 다리를 갖다대었을
거미, 거미줄
-
얘야, 내가 니 어미란다
--
종이로 만든 나라
--
나라를 만든다
아이들이
종이죽으로
동쪽은 높게 서쪽은 낮게
복잡한 서해안은 이쑤시개로 섬세하게
A4 코팅지 지도 그림을 따라
북위 33도에서 43도,
동경 124도에서 132도
딱 손바닥만한 나라
나라 하나 만드는 데 한 시간도 안 걸린다
그 나라에서
아이들은 자두, 딸기, 돼지의 태몽으로 태어나
다시 용이 되고 호랑이가 되고
어쩌면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꾼다
-
아이들이 만든 한반도가
창가 햇살에 하얗게 말라 누룽지처럼 일어난다
제주도, 울릉도, 독도 이런 섬들은
티끌처럼 떨어져나가기도 한다
그 티끌 같은 섬에서
오래 전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었고
얼마 전에는
그 섬으로 가던
어린 꽃들이 물에 빠져 죽어갔다
그리고 그 슬픔은 마르지 않는 종이죽처럼
봄햇살에 다시
끈적하고 질척하게 살아난다
--
추석 무렵
--
지진이 일어났다
땅속 깊숙이 자고 있던 지진파가
부스럭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우리는
족발집에서 인간관계의 균열에 대하여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존재의 흔들림에 대하여, 그 흔들림으로
조직이 어떻게 뒤틀리는지 어떻게
혼란에 빠지는지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게 밖으로 나와 전화기를 들고
불안에 떨었다 멀지 않은 원전을 우려하는
소리도 있었다 중력보다 묵직하게
몸을 끌어당기는 취기를 밀어내려고
나는 눈을 크게 껌벅이는 것이지만
여기, 소주 한 병 더!
족발접시는 비어가고 소주잔은 차올랐다
우리 믿음의 접시는 바닥을 드러내고
울분과 분노와 공포가 코 밑까지 차올랐다
자꾸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밤이었다
남은 지진이 간밤 우리의 침대를 몇 번 흔들었으나
아침이면
선물 세트를 든 손이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택시 문을 무겁게 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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