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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외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98556059
· 쪽수 : 512쪽
· 출판일 : 2025-11-13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서 파르나서스는 연락선에서 내렸다. 섬에는 몇십 년만이었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아서는 그 자리에서 화르르 타오를 것 같았다. 가슴 속 불이 이토록 밝게 빛나는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대로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라 소금기 섞인 바람을 자신의 깃털로 느끼고 싶었다.
안 될 일이었다. 섬을 떠나 영영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에겐 돌아온 이유가 있었다.
숭숭 파인 얼굴에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은 뱃사공 메를이 뱃머리에서 외쳤다. “확실히 해요. 내가 이대로 떠나면 당신은 여기 발이 묶여요. 난 해진 뒤엔 바다에 안 나오니까.”
아서의 시선은 이미 저 멀리 흙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길은 숲속으로 구불구불 이어졌다. 한낮의 햇살이 이끼와 낙엽에 조금도 닿지 않을 만큼 울창한 나무숲. 시선 뒤로 귀를 가득 채우는 파도 소리.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좋은 것, 나쁜 것, 모두 다.
그는 연락선을 힐끗 돌아봤다. “전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메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육지로 돌아갈 일이 생기면 연락할게요.”
“어떻게 말입니까? 이 섬엔 전화도, 전기도, 물도 없어요.”
“이제 바뀔 겁니다. 내일 아침 10시 정각에 설비가 도착하기로 했거든요. 실어다주실 거죠?”
메를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서는 그 두 눈에 스치는 욕심을 포착했다. “뱃삯을 더 줘야 합니다. 기름값도 비싸고, 여기 왔다 갔다 하는 데만….” 메를이 통보하듯 말했다.
“물론 충분히 보상해드릴 겁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뭐.” 눈을 깜빡이던 메를은 아서의 양옆에 놓인 여행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낡은 가방 하나, 새 가방 하나. “여긴 왜 왔습니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그 아래 바다처럼 푸르렀다. 여름의 끝자락이라 따뜻했다. 아서는 코를 간지럽히는 짠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여긴 저주받은 곳이에요. 유령이 들렸다나. 오랫동안 무인도였어요.” 메를이 부르르 떨더니 난간 너머로 침을 퉤 뱉었다. “사람들이 살던 시절에 대해서는 다들 쉬쉬합니다.”
“알죠.” 아서가 중얼거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메를, 혹시 멜빈이라는 분 아십니까?”
“그 사람을 어떻게? 우리 아버진데.”
“역시 그랬군요.”
우로보로스. 자기 꼬리를 무한 반복해서 삼키는 뱀. 어쩌면 이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방금 떠나온 바닷가 마을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분홍, 노랑, 초록색으로 은은하게 칠해진 건물들, 유유자적 오가는 휴가객들. 왜 아니겠는가? 그들은 인간인걸. 세상은 그들을 위해 만들어졌는걸.
연락선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새로 페인트칠하고 너덜거리는 좌석을 교체했을 뿐이다. 뱃사공 역시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메를의 처진 입매와 생기 없는 눈은 멜빈을 너무 닮아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서만 빼고.
“한때 안면이 있었습니다.” 당신도요, 하고 아서는 덧붙일 뻔했다. 대걸레를 들고 연락선 주변을 배회하던 음침한 십 대 소년을 떠올리며.
“죽었습니다. 십 년 전에.” 메를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메를은 손을 휘휘 저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였습니까?”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아서는 빙그레 웃더니 두 가방을 집어 들고 어깨를 폈다.
마침내, 기어이, 이곳에 왔다.
때가 되었다. 그는 앞으로 해나갈 시도가 헛되지 않길 바랐다.
“당신의 친절과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가볼게요.”
6월의 따뜻한 아침, 아서 파르나서스는 눈을 뜨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강렬했다. 잠이 덜 깨 몽롱한 머릿속에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지난주, 악마의 아들이 태양을 지구에 박아버리겠다고 위협했었다. 폭풍우가 물러간 뒤 자신 이 만든 진흙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다 저지당하자 꺼낸 카드였다. 아서가 진흙투성이 소년을 발견했을 때 진흙 인간은 반쯤 완성된 상태였다. 진흙에 의식을 불어넣어선 안 된다고 말하니, 소년은 늘 그렇듯 행성 멸망으로 복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아서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확신했다. 루시가 실제로 태양을 지구에 충돌시키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 진창으로 돌아간 그 진흙 인간에게 루시가 지나치게 집착한 건 사실이었다.
침대 옆에 놓인 알람 시계를 흘깃 본 아서는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는 것이 태양이 아니라 훨씬 더 끔찍한 무언가임을 깨달았다.
토요일 아침 8시 32분인데 집 안이 조용했다.
형태와 크기, 능력이 제각각인 여섯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늦잠을 자는 것은 어림없는 꿈이었다. 아이들, 특히 이 아이들은 시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제만 해도 새벽 5시 반에 무정 형 초록색 덩어리가 침실에 난입하더니 특유의 질척한 목소리로 코에서 검은 잉크가 뿜어져 나왔다고 외쳤다. “펜을 집어삼킨 것 도 아닌데 왜 제가 잉크를 찍찍 흘릴까요? 맙소사, 제가 남자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천장에 묻은 잉크는 어떻게 닦나요?”
그 잉크가 사춘기의 징후임을 알게 된 덩어리 소년은 얼굴을 찡 그리더니 자신에게 콧수염이나 가슴 털이 잘 어울릴지 물었다. 간신히 소년이 진정하자 다른 세 아이가 침실에 들어왔다. 아침 6시도 채 안 됐을 때였다.
이제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든 아서에게 아침 6시는 예전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기지개를 켜자 뼈 마디마디가 신음하고 밝은색 머리카락(흰 머리가 매일 늘어나는 듯했다)이 이리저리 뻗쳤다. 발가락을 쭉 뻗자 등에서 경쾌하게 뚝 소리가 났다. 마지막 잠기운 이 가시면서 어수선했던 머릿속이 명료해졌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아서가 부엌문을 밀어젖히자 문짝들이 벽에 덜컹 부딪혔다. 오가던 말들이 뚝 끊기며 모두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루시. 혀끝을 잇새에 빼문 채 의자를 끌고 부엌을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위험한 일을 벌일 때면 으레 그러듯 두 눈은 붉게 빛나고 머리는 검은 뿔처럼 양쪽으로 뻗쳤다. 축 늘어진 흰 면티와 해진 체크무늬 반바지에 프릴이 달린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탈리아. 땅딸막한 정원 노움은 달걀을 열두 개쯤 안고 있었다. 가슴까지 오는 풍성한 흰 수염은 끝이 고리처럼 말렸고, 빨간 고깔모자 아래 흰 곱슬머리가 빼꼼 나왔다. 검정 벨트가 달린 파란 조끼, 무릎까지 오는 갈색 바지, 노른자로 보이는 얼룩이 묻은 검정 장화 차림이었다. 햇볕에 그은 까무잡잡한 얼굴과 손이 정원에서 보낸 긴 시간을 증명했다. 푸른 눈이 가늘어지면서 앵두 같은 입술이 오, 하고 벌어졌다.
다음은 샐.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에서 작고 복슬복슬한 개로 변신할 수 있는 셰이프시프터. 올해 열다섯 살인 샐은 최연장자로 다른 아이들이 곧잘 따랐다. 조용하던 소년은 점점 더 자기 목소리를 냈고, 누구든 사로잡을 만한 글을 썼다. 어느새 키가 라이너스만큼 훌쩍 크고 이마와 코에 난 여드름에 울상을 짓는 사춘기 십 대 소년이었지만, 검은 눈동자에는 나이를 초월한 성숙함이 엿보였다. 황갈색 반바지와 자개단추가 달린 노란색 반소매 셔츠는 짙은 갈색 피부와 잘 어울렸다. 길어진 머리는 조이가 가르쳐준 대로 가닥가닥 꼬았다.
천시는 바닥에 놓인 걸레통에 들어앉아 있었다. 통 안의 비눗방울이 더듬이에 달린 두 눈 사이까지 날아가 묻었다. 그 위 조리대에 앉은 음험한 고양이 칼리오페는 앞발에 묻은 반죽을 핥으며 아서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꼬리가 불길하게 살랑거렸다.
이어서 시어도어. 주둥이를 쩍 벌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쭉 찢어진 콧구멍에서 연기를 뿜어내던 와이번이 아서를 보자마자 턱을 딱 다물고 나오려던 무언가를 삼켰다. 하지만 이내 검은 연기를 캑캑 내뱉으며 증거를 인멸하고자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였다.
“어, 제가 설명할까요?” 루시가 말했다.
“할 수 있겠니?” 아서가 상냥하게 물었다. “듣자 하니 시어도어를 부추겨 불을 지르려던 것 같은데.”
“정확해요! 역시 절 너무 잘 아세요. 어차피 이건 불에 타도 괜찮은 의자잖아요? 라이너스의 의자지만, 저번에 저한테 서서 먹는 게 좋다고 했거든요.”
라이너스는 코웃음을 쳤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시어도어.” 아서가 말했다. “사실이니? 불을 뿜을 수 있다는 게?”
와이번은 샐을 힐끗 보았다. 샐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어도어는 날개를 펴고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쩍쩍대고 그르렁거렸다. 시어도어는 며칠 전 잠을 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묘한 빛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부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간지러웠지만 곧 사라지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바로 오늘 아침,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하품하는데 입에서 작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아프진 않고, 뭉친 근육을 풀 때처럼 시원했다고 시어도어는 쩍쩍거리며 덧붙였다. 그러고서 아서 조차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