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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현대미술
· ISBN : 9791187938057
· 쪽수 : 50쪽
· 출판일 : 2019-08-30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것은 다시 그림이 되기 위해 형상을 갖는다. 이 형상들은 여럿의 풍경에서 불려 나온 것인데, 어떤 분위기로, 장소 간의 낙차 없이 “닮음” 속에 공존한다. 흡사 사진처럼 우연 속에서 풍경의 한 찰나를 특별한 어떤 것으로 끌어내는 시각적 감동을 일으키면서도, 그는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던 눈의 감각을 경유하여 붓을 쥔 손에 이르러 이미 눈이 본 것에 대해 그릴 것을 다짐한다. “오후 서너 시”라는 공간적 시간과 “벽과 벽 사이”라는 시간적 공간을 병치시킨 전시의 제목처럼, 이현우는 그러한 풍경의 조건들이 이루어내는 회화적 장면을 드러내기 위해 붓의 흔적과 형태의 자리를 세밀하게 조율한다. 그림 그리는 이의 눈에 붙들린 풍경은 마치 그림이 되기 위한 형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풍경 그림 앞에 서게 될 또 다른 이의 경험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표현된다. 붓의 떨림과 물감의 두께, 추상적인 선과 색의 자리, 그 모든 것들의 당위를 설명하기 위해 결정된 형상으로서의 풍경처럼, 펼쳐놓은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그의 그림 앞에 서있는 자들이 겪어야 할 바라봄의 경험이다.
…
그는 풍경 속에서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순간을 관찰한다.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로 특정된 풍경의 조건은, 그것이 회화로 전환되는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 일으킨다. 그것은 풍경의 한 장면을 지시함으로써 재현된 대상과 동일한 것, 즉 “같음”으로 간주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것과 닮은 형상들이 현실로부터 멈춘 채로 비장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각각의 형상들이 지닌 추상성과 다수의 붓질이 지닌 적막감이 이러한 존재의 인식을 크게 북돋아주는데, 이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선 구경꾼의 시선을 (잠시) 사로잡아둠으로써 어떤 사건처럼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난다. 이처럼 평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상의 단조로운 풍경들이 회화로 전환되는 순간에 다다르기 위하여, 이현우는 사진가의 시선과 회화적 경험이 어떤 일치와 공감을 이루는 현상학적 지각의 역설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 안소연, 미술비평가 <그림이 되기 위한 형상 > 중 -
이현우의 풍경은 사진으로부터 파생되어 회화를 거쳐 또 다른 현실의 풍경으로 우리의 눈앞에 불려온다. 현수막이나 가림막, 셔터 등을 주된 소재로 그렸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정면성이 부각된 파사드를 보여주었지만, 최근의 작업들에서는 보는 위치를 사선으로 비껴 공간의 깊이를 드러내고 벽과 측면 공간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큰 벽과 크고 작은 건축적 요소들은 대비되고, 그 대비의 강도는 그림자의(더 정확히는 그림자의 각도) 존재를 통해 부각될 뿐만 아니라 시간에 대한 단서 또한 제공한다. 색조나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붓질의 흔적도 그러한 시공간의 분위기를 공조하고 증폭해낸다.
원본 사진의 이미지를 자르고 보정한 결과물로서의 풍경은 그렇게 회화로 옮겨지면서 다시 그 곳, 그 시간의 체취를 복원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풍경과 처음 조우했던 순간의 멜랑콜리, 재현의 가능성을 회화에서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영상의 스틸 컷처럼 정지된 시공간 속으로 감상자를 데려간다. 보나르(Pierre Bonnard)의 표현대로 미술이 정지된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이현우의 풍경은 이 세계와, 적어도 그가 순간 정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름의 느슨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현우가 사진으로, 다시 회화로 정제한 풍경들은 동결된 이미지에 온도와 질감을 부여함으로써 동시대 많은 시각 이미지나 무빙 이미지들의 속도와 연속성으로부터 비켜서서 세계의 한 단면을 조용히 추출해낸다. 오후 서너 시, 벽에 걸린 비스듬한 그림자처럼.
- 정주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풍경에 남아 있는 것들>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