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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9176877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22-10-31
책 소개
목차
007 작가의 말
013 오후 두 시의 친절한 이웃
043 토끼마켓
073 빌라로부스 전주곡
107 소심한 복수가 아니었다면
143 안드로메다은하로 가자
173 한여름 밤의 흑백영화
205 기서리에서 우리는
243 그 밤의 연주
271 작품 해설 양진채 소설가
냉정한 세상, 외로운 인간을 보듬는 따뜻한 소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노인은 심호흡을 해도 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기침을 토해낼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노인은 이제야 금속에 벤 듯 아린 발을 내려다봤다. 맨발이었다. 노인은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보행보조기를 옮겨놓고 종종걸음으로 발짝을 떼었다. 몇 발짝 떼는 사이 오목한 곳에 쌓인 눈을 밟은 노인은 짧은 비명과 함께 균형을 잃고 눈 위로 고꾸라졌다. 노인은 눈 속에 처박힌 보조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몸을 뒤척일수록 눈은 옷 속으로 파고들어 피부를 도려내는 듯했다. 노인은 일어서 보려고 한참을 버둥거렸지만 통증만 느껴질 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은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어 눈밭에 묻혀 간당거리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다시 눈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논바닥에서부터 불어오는 칼바람이라도 자신을 옮겨놔줬으면 하는 어림없는 생각을 하며 쓸데없는 객기를 부린 자신을 책망했다.
눈보라는 깡마른 노인의 젖은 몸 위에 두텁게 쌓여갔다. 노인은 사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간 것은 자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혹독하게 불어오는 눈보라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이럴 때 사내라도 와줬으면 싶지만 오늘은 더 이상 사내의 방문은 없을 것임을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 「오후 두 시의 친절한 이웃」 중에서
빛바랜 커튼을 젖혔다. 저수지 쪽으로 난 창문을 밀치자 안개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안개라면 저수지 가장자리에 있는 그녀 집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벽에 갇힌 듯 두려움이 밀려왔다. 문득 안갯속에서 만석이 손을 내미는 듯해 그녀는 순식간에 창밖 회백색 허공으로 손을 내밀어 휘저었다. 차디찬 안개 입자만 손끝에 매달렸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오늘 같은 날은 허망하게 간 만석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만석이 빗속으로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그해 여름밤 이후, 그녀는 손전등을 들고 그를 따랐어야 했다는 후회가 지금껏 가슴을 때렸다.
한 움큼의 모래를 털어 넣은 듯 입이 마르고 버적거려 물을 마셨다. 좁아진 목구멍 탓인지 물은 가는 시냇물 소리를 내며 오래 넘어갔다. 먹는 음식마다 달게 느껴지던 젊은 날이 떠올랐다. 된장만 지저도 밥이 달아 입이 쓰다는 사람을 이해 못 했다. 그녀는 그 나이가 됐다는 게 서글퍼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벽지의 모란꽃무늬는 무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바래서 얼룩처럼 보였다. 만석이 살았을 때 발랐으니 근 스무 해가 넘어갔다. 만석이 의자에 올라가 풀칠한 도배지를 자루가 긴 빗자루로 쓸어내리면 그녀는 씰룩거리는 의자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리고 국수를 벌겋게 비벼 먹으며 지친 웃음을 나눴다.
― 「한여름 밤의 흑백영화」 중에서
샤워를 마쳤는데도 여전히 피곤이 묵직하게 짓눌렀다.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텔레비전을 켰다. 이곳 쌀밥처럼 풀풀 날아갈 것 같은 언어가 앵커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해독이 불가능한 자막도 화면에서 꾸역꾸역 나왔다 사라졌다. 뜻도 모르는 뉴스를 한참 들여다보다 호텔방 커튼을 젖히고 창을 열었다. 밤 공기는 낮의 무더위에 비해 산뜻했다. 상반신을 어둠 속으로 깊숙이 내밀고 먼 곳을 바라봤다. 십 층 위에서 내려다본 아래는 어두워서 오히려 두렵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지금껏 애증을 버리지 못하는 이 땅의 밤하늘은 한없이 평온하고 적막했다. 서울에서 볼 수 없었던 별이 총총히 빛을 발했다. 나는 밤 공기를 크게 들이켰다. 가까운 곳에 농장이라도 있는 것인지 갑자기 바람에 섞여 열대과일의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멀리서 별이 하나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늘과 땅이 만났을 먼 지점을 한참 바라보다 씨발,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어둠에 대고 욕을 뱉어냈다. 처음 불러본 노래 가사처럼 생소했지만 목에 걸린 어떤 것이 빠진 듯 후련해졌다. 여행지에서 따로 여행 온 것처럼 흥분이 밀려왔다.
낮에 본 뚜엔의 장대높이뛰기처럼 세상 한 점에 폴을 꽂고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삶이 아닐까. 어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점점 더 두터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갈 듯 아득해 왔다. 어둠을 오래 바라보는데 시작도 끝도 없고 기척 하나 없는 허공에서 높지만 신경질적이지 않고 애잔하지만 구슬프지 않은 마두금 선율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들어야 할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그 밤의 연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