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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가톨릭 > 가톨릭 일반
· ISBN : 9791192063010
· 쪽수 : 344쪽
책 소개
목차
추천사 · 7
간행사 · 12
1부 신앙의 요람, 평양 교구
1장 사제 성소로 이끌린 어린 시절
우리 집안 · 27 | 진남포성당 · 32 | 복사를 서다 · 37 | 진남포의 은인, 스위니 신부님 · 39 | 배 신부의 시약소 · 43 신사 참배 · 46 | 해성학교 - 교리공부를 하다 · 51 | 나의 반성 · 56 서포 예비 신학교 · 59 | 장정온 악니다 수녀님과 인사 · 64 | 소신학교 - 덕원과 서울 동성신학교로 나뉘다 · 66
2장 아름다운 기억, 신학교 시절 덕원신학교 신학생이 되다 · 71
신부 여섯만 나와도 내가 춤을 추겠다 · 75 | 소신학교 시절 · 77 | 공부는 열심히 · 82 | 최고의 교수진 · 86 안셀름 로머 교장 신부 · 87 | 루치오 로트 원장 신부 · 93 라틴어 선생님 · 95 | 아르눌포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 · 97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 · 100 | 평신도 교사들 · 104 | 신학교 관현악단 · 106 | 그레고리오 신부님 · 111 | 깐또르가 되다 · 114 월반을 하지 않다 · 117 | 덕원신학교의 학풍 · 122 | 담배 허용 · 122 자율적인 학교 분위기 - 경계는 없어 · 124 | 신학교에서도 내선일체 · 127 | 금강산 소풍 · 129
3장 나의 가족, 해방을 맞은 우리
부모님 · 137 | 큰형 건희 모세 형님 · 140 | 작은형 곤희 형님과 동생 봉희 · 145 | 누이동생 요안나 · 147 해방을 맞다 · 151 | 해방 후의 평양 · 154 | 관후리성당 재건 · 156 | 우리 신학생은 우리 손으로 · 159
4장 시작되는 공산 탄압
차부제 서품 · 167 | 덕원신학교 - 시련을 맞다 · 168 | 잡혀가신 주교 아빠스 · 174 | 끌려가신 교장 신부님과 독일 수도자들 · 178 덕원신학교 강제 폐쇄 · 181 | 평양교구 - 홍용호 주교님을 잃다 · 185 길 잃은 양들은 어디로 · 189 | 진남포 이야기 - 우리는 유대철처럼 될 거야! · 193 신부님을 지키는 신자들 · 199 | 조문국 신부님 · 202 월남 계획을 세우다 · 206 | 드디어 서울에 · 221
2부 사제의 길
1장 새 사제 시절과 6·25
사제 서품 - 가장 기쁜 날! · 229 | 첫 소임 - 명동 보좌신부 · 235 | 6·25 발발 · 236 | 모리 멜리우스 에스트 · 239 | 피난민들에게 고해성사 · 241 | 형님을 만나다 · 242 | 전란 중 명동성당 미사 · 247 | 북한군 명동성당 점령 · 249 | 중부보안서에 잡혀가다 · 250 | 명동에서 쫓겨나다 · 253 | 다 맡기고 떠나는 길 · 255 | 구산공소 · 259 | 서울로 돌아오다 · 261 | 9·28 수복 후 평양으로 돌아가다 · 263 | 주교 아빠스의 무덤을 참배하다 · 266 | 우리는 평양교구 신부다 · 269 | 다시 찾은 진남포본당 · 272 | 영유본당을 뒤로 하고 · 275 |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 277 | 포로수용소 군종 신부로 · 278 | 이산가족 상봉 · 282
2장 평양교구 출신의 주교
부산 가톨릭 도서관 부관장 · 289 | 성신소신학교 교사로 일하다 · 291 | 감독 신부 시절 · 295 | 로마 유학 · 296 | 지학순 주교와의 우정 · 302 | 학위를 마치다 · 308 | 중앙협의회 총무 시절 · 309 | 김남수 주교와의 우정 · 310 바티칸 공의회 참석하다 · 314 | 주교 수품 · 316 | 바오로 6세 알현 · 318 | 수원교구장 시절 · 321 | 서울교구장 서리 · 324 | 하느님 안에서 살아온 나의 삶 · 328 | 통일은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 330
에필로그 · 334
책속에서
“여러분 영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들어보세요. 가령 아주 큰 바위산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매년 새 한 마리가 그 산에 와서 앉아요. 천 년 동안 천 번을 와서 새가 내려앉으면 그만큼 새 발자국이 바위 위에 찍히겠지요. 그러면 그만큼 바위가 작아지겠지요. 그렇게 해도 영원은 아직 시작도 안한 거예요. 그 새는 지금도 저 산에 와서 앉아요. 우리는 지금 영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알듯 말듯 한 설명이었다. 나는 큰 새가 날갯짓을 하면서 산 정상에 앉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새는 산 정상에서 영원의 모습을 보았을까? 생각할수록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영원, 주님의 영원성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 내용도 무척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다. 그때 죽기 전에 세례를 받으면 바로 천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나는 왜 어릴 적에 죽지 않았을까? 그때 바로 죽었으면 직(直) 천당 할 수 있었을 텐데 …’
- 사제 성소로 이끌린 어린 시절
(덕원 신학교) 로머 교장 신부님은 공산당에 끌려가 옥사덕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으시다 1951년 11월에 예순여섯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교장 신부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학교로 돌아가 사랑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는 덕원신학교를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선배 신부들을 생각하고 특별히 교장 신부님을 생각한다. 교장 신부님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빅토리노, 네가 원하는 게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냐? 네가 행하는 게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오늘에 이를 때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교장 신부님의 그 질문은 나에게 하나의 나침반이었다. 스승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곧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너 잘하고 있느냐? 빅토리노~”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노정에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스승 로머 교장 신부님의 가르침을 지금도 듣고 있다.
- 아름다운 기억, 신학교 시절
일제의 식민지로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조국의 해방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도둑처럼 조국 해방이 찾아온 것이다. 그날 해방의 기쁨을 알려줄 종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교회 종탑에 달린 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전쟁 물자에 필요한 고철과 금속물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교회 종탑의 종들을 모조리 뜯어간 게 오래전이었다. 독일의 나치가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수도원과 마을 성당의 종들을 몰수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덕원수도원의 종은 그때까지 살아남아 해방의 기쁨을 수도원 하늘 높이 울려퍼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 종소리 또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의 기쁨은 정말 잠시였다. 북한 지역이 소련군의 점령 하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 나의 가족, 해방을 맞은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