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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079448
· 쪽수 : 152쪽
· 출판일 : 2023-01-02
목차
시인의 말
1부 나는 카셀에 간다
나는 카셀에 간다
나의 아저씨
니이체 숲속
설탕창고
실기실의 그림들
오늘은 더 잘 살아야겠어
테스트 프린트
조랑말 10호
중광의 그림
피터 도이그는 미끄러운 면 위에 마음을 그린다
2부 봄을 처방받은
400년 두부집에서
나의 2월
보헤미안 랩소디
새 영등포
불멸의 이 술집
속눈썹에 풀색 잠이 매달린다
작아지며 크는 키
재봉틀
품위 있는 옷
나는 가방을 잘 잃어버린다
3부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아요
서발턴
H.M.의 방
광화문 광장에서
구름
끝없는 집
알카트레즈
나전
독립운동가 김승만이 북경에서 죽었듯
모스크바 어묵탕 빠
알바니
애정결핍의 계보
장미만찬
폭염
카메라 옵스큐라
한반도
4부 지극히 극적인 순간들
겨울
나 좀 살려도
마음을 연다는 것
날개
뜨거운 가족
반짝반짝
사람이 모르는 것
사랑한다는 말 대신
살림 및 죽임
슬기로운 시인 생활
언니 같은
여름 만화
5부 폭신하고 하얀 질문
TR4
개가 짖지 않고 말을 한다
문득,
봄비가 고양이처럼 봄밤에 뛰어내린다
비꽃
비닐 작업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죽은 시들을 위한
캐나다 보행길
토마토 행성
해설
가족사, 혹은 연민과 사랑의 시학 | 홍신선(시인 · 전 동국대 교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70개의 철 깡통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었다
망치로 내리쳐 찌그러진 느낌을 주려다
손바닥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상을 입은 여름 저녁, 비구름 그림자 속에서
내리칠 때마다 꺅꺅 소리 지르던 깡통들은
얻어맞은 자국 욱신거리는지
조금만 건드려도 끙끙거린다
허니 바케스*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달콤한 이름 안에 담겨
쓴 것에 절여져 사라진 이름들이
한 장의 종이처럼 갈기갈기 찢겨
투명한 바다에 던져졌다
우리 중 누구도 이 전쟁에 자유로운 이 없기에
이 땅에 포로가 아닌 사람이 없다
태어날 아기들은 철조망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게 해 주세요
힘찬 울음소리에 박힌 철 가시에도 녹이 슬 즈음
찌그러진 캔들이 비를 맞는다
녹빛이 쩔쩔 소리를 내며 미술이 된다
언젠가 카셀에 가서 전시회를 하면
아주 오래돼서 그저
녹빛만 도는 일이었음 좋겠다
나는 카셀에 간다
*도쿠멘타 : 독일의 카셀 지역에서 5년마다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회.
실기실의 그림들
실기실은 어쩐지 냉장실 같아
두꺼운 도어를 열고 들어서면
재료들은 모두 이슬점에 닿아있어
나는 그 신선한 온도가 그림 속에서
이슬방울로 살아나는 걸 보고 있어
실기실 사람들은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리지
금세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의 시를 그린 사람도 있어
밥 그리는 사람과 밥을 먹는데
처음 밥 먹는 사람과 처음 밥 먹어 봐요?*
라는 물방울 모양의 말이
응집된 채로 찰랑거리고 있어
내 그림 속의 이슬로 걸어 들어가
내가 흠뻑 신선해질 때
아직 그리지도 않은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어
이가 시릴 만큼 찬, 한 방울의 투명한 시를
핥으려는데
사앗
혓바닥이 딱 붙어 버렸어
*영화 타자2의 대사 중에서
니이체 숲속
그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다
겨우 아는 한글 몇 자로 읽어보려 애쓰던 책들
그중에 니이체 全集이 있었다
눈을 껌뻑이다가 全자가 숲자와 비슷해서
나는 니이체 숲속이라고 읽었다
그림 한 점 없는 그 숲에서
듬성듬성 돋아있는 한자는 풀 같고 나무 같았다
니이체 全集이라는 금박의 글자를
니이체 숲속이라고 읽던 내 마음의 푸나무들
나이가 들어서 나는 니이체의 책장을 열고
큰 나무의 넓은 잎새를 들여다본다
중심을 향해 모이고
중심에서 퍼져 나가는 모세의 잎맥 하나가
숲과 이어지듯 생각은 길이 된다
쓰라린 날들의 진액이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수액처럼 천천히 흘러내린다
어려움을 견뎌내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고난의 한 가운데에 심은 잠언 한 그루는
나의 숲에서도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다
나는 어느새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다
올려다보면 황금색 털 덥힌 열매들이
금세라도 떨어질 듯 잎새를 잡아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