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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책읽기/글쓰기 > 책읽기
· ISBN : 9791192128177
· 쪽수 : 208쪽
· 출판일 : 2022-10-2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 부처의 탄생, 『금강경』의 탄생
1.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다
2. 불교의 혁명, 대승불교
3. 『금강경』의 탄생, 아라한에서 보살로
1장 『금강경』, 번뇌를 깨뜨리는 번개 또는 귀중한 보물!
1. 『금강경』의 의미
2. 질문하는 자, 수보리
3. 혜능, 『금강경』을 만나 나무꾼에서 선불교 스승으로
4. 지금도 『금강경』!
2장 모든 상(相)은 망상! —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1. 마음 방향 돌리기, 나에게서 우주 만물로
2. 번뇌를 일으키는 네 가지 상(相)
1) 아상(我相) — 절대적인 나, 변하지 않는 너 / 2) 인상(人相) — 아상의 집단화 / 3) 중생상(衆生相) — 생명을 구분짓는 마음 / 4) 수자상(壽者相) — 젊음과 몸에 대한 집착
3. 상(相)이 없다는 상(相)에도 머물지 마라
3장 묘한 행동은 대상에 얽매임이 없고—묘행무주 행어보시(妙行無住 行於布施)
1. 보시의 출발은 재보시
2. 나의 어긋난 재보시 흑역사
3. 주위를 편안히 하는 무외시
4. 차원이 다른 법보시
4장 머무는 바 없는 한없는 자비—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1. 상(相)을 깨는 즉비(卽非), 머무르지 않는 지혜
2. 흐르는 마음, 자비(慈悲)
3. 네 가지 광대한 마음 — 사무량심(四無量心)
에필로그 : 일상에서 보살 되기
부록 : 『금강경』 원문
저자소개
책속에서
수보리가 보살승 운동의 초기 경전인 『금강경』에서 질문자로 발탁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그가 한 ‘모든 사람이 최상의 진리를 성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발원이다. 사실 아라한들은 번뇌를 소멸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특별히 무엇인가를 더 원하거나 가지려고 하는 인위적인 문제의식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가지 에피소드로, 아라한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 있으면 숲속에 홀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아라한이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적은 음식을 먹으며 굳이 탁발을 나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자비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아라한을 호되게 경책한다. 탁발은 수행자들이 일반 중생들을 교화하는 중요한 자비행이기 때문이다.원빈, 『원빈 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53쪽 이 에피소드 속 아라한과 달리 수보리는 보살이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 준다. ‘상구보리’— 즉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이면서 동시에 ‘하화중생’—다른 중생을 위한 자비 명상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1장_『금강경』, 번뇌를 깨트리는 번개 또는 귀중한 보물! 중에서]
보살은 모든 상이 망상임을 알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분별이 일어난 순간에 자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과 선악을 얹어 ‘상’을 만든 것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기도 하고, 같은 팀 조원이 발표 준비에 무임 승차하기도 하며, 잠들기 전 거울 속 눈가의 주름을 보고 매 순간 분별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이 분별이 그 순간 마음에서 일어난 먼지구름일 뿐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분별이 일어난 순간조차도 없애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면서 비법상非法相이라는 상을 다시 만들어 낸다. 이렇게 되면 일상에서 늘 마주치는 다양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에 대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없애야 해!”라는 다짐을 하게 된다. 결국 또 다른 상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비법상으로 만들어 내는 상은 ‘무아無我라는 상’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피하려는 마음으로 또다시 새로운 상을 만들어 내다니! 다행히도 부처님은 여기까지 내다보셨다. 그래서 『금강경』을 통해 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상에도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전한다.[2장_모든 상(相)은 망상! ―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중에서]
이런 사례는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를 잘 들여다보니 ‘보시를 많이 하면 빨리 깨닫겠지!’ 하는 나의 욕심이 보인다. 이렇게 아상이 작동하는 마음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불교의 진리—‘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다’를 듣고 나는 사실 두려웠다.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변해서 지금 누리는 행복이 사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불법을 만났으니 이 이치를 깨달으면 결국은 사라지고 변하는 행복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궁극적 진리를 깨달으면 지극한 행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이 상상은 맞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제대로 알면 탐진치貪瞋癡 번뇌가 줄고 주위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이 된다. 이것이 지극한 행복이다.
문제는 내가 법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고 두려움으로 인해 중생과 부처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중생을 벗어나 빨리 깨닫고 싶다는 욕심으로 행동했던 것이었다. 마음속 깊숙이 도사렸던 두려움은 곧 집착과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하루라도 먼저 깨달아 허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많이 퍼주는’ 것이 내게는 보시였다. 보시하는 행위의 밑바닥에는 ‘나는 이 정도는 한다’라는 아상은 물론이고 깨달음이라는 결과에 빨리 도달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었다. 즉 아상과 중생상이 강하게 작동하여, ‘대단한 나’라는 아상과 ‘부처가 되기 위한 중생일 뿐인 나’라는 중생상에 얽매여도 너무 얽매인 보시였다. [3장_묘한 행동은 대상에 얽매임이 없고 ― 묘행무주 행어보시(妙行無住 行於報施)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