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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374086
· 쪽수 : 136쪽
· 출판일 : 2022-08-10
목차
1부 원점
귀향 1
창조
죄수의 딜레마
원점
잡념
18시 27분 36초
종이배
긴팔원숭이의 꿈
쌍성계에 관한 고찰
낙관주의자
편지
어떤 영감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날에
나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2부 어렸던 내일의 나에게
해바라기
잔향
악몽
질경이
이데아
거울연가
하루의 끝
파편화된 투쟁
어느 비 오는 날에
어렸던 내일의 나에게
남쪽 마을은
귀향 2
밤샘
간극
방충망 안에서
알약
3부 별
별 1
별 2
은하의 중심에는 블랙홀이 있다
내일에 서서
불면증 _별을 세며
장막 너머
은막
새벽
별 3
날개 꺾기
사리
거북목
마시멜로 이야기
실종
연주 _시차
역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4부 삶의 의지
재시작
스톡홀름 증후군
행성이 정렬된 날에
냉방병
모래시계
죽어버린 며칠에 대한 추모
방안에서
4월 33일
2022년 6월 26일
삶의 의지
창밖에서 일어나는 일
야경
발화
약속
우화
5부 국소적 운명론자 씨의 일일
제값
흑요석 문 너머의 세상을 아시겠어요
아폴로 1호
불완전연소
즉흥곡
그의 눈동자 안에서
오토마타
짧은팔원숭이
행성이 정렬되지 않은 어느 아침에
비행의 꿈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산다
신중하게 함부로 골라 담은
편지지
벌
국소적 운명론자 씨의 일일
시집해설 - 복효근 시인
저자소개
책속에서
실존적 절망을 넘어서 발견한 이데아의 언어
복효근(시인)
모든 발걸음은
폐허로의 산책일 뿐이다
「은하의 중심에는 블랙홀이 있다」 전문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을 절망으로 규정했다. 그는 “절망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절망, 원하지 않음에도 피할 수 없는 절망, 스스로 절망을 원하는 절망”으로 구분하였다. 어떠한 절망이든 인간은 이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실존적 절망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되는데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각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적으로도 짧은 순간에 머물다 가는 것이고 광활한 우주 속에서도 인간 자신은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누구도 절망을 피할 수 없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것이 절망의 원인이다.
이 불완전성에서 비롯되는 절망을 자각하는 것은 그러나 그것으로부터의 구원을 꿈꾸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정해진 의식이나 사람들의 판단과 결별하고, 절망적 존재가 신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라고 하였다. 절망을 구원하는 완전하고 완벽한 절대자를 상정한 것이다. 이른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철학의 요체라고 할 것이다.
박성후 시인의 시는 이 절망에서 시작한다. 그는 광활한 우주 저쪽으로 망원경을 대고 천체를 관측한다. 별을 찾으려 하기보다 그의 관심은 ‘나’(인간)에게 있다. 망원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들여다보려 하지만 맨 처음, 그리고 매번 그에게 보이는 것은 절망이다. “여기 있음에 관하여/ 어떤 해명도 내놓을 수 없는 이유에서다”(「천장」) 내가 여기 있음에 대하여 어떠한 해명도 찾을 수 없다, 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우주의 미아처럼 내 존재를 규명할 수가 없다. 나를 찾으려 우주에서 내 좌표를 찍어보려 망원경을 들이댔으나 고독한 단독자로서 절망만을 안고 서 있다. “180도로 마주 본 거울에 무한이 있었다.”(「거울연가」) 시인은 거울을 통해 천장을 들여다보았으나 그가 발견한 것은 ‘무한’이었다. 저 무한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한찮은가? 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인간은 정말이지 비루하다. “참 안타까운 것은/ 나 하나를 안아주기에도/ 너무나 짧고 비루하다는 것이다.”(「긴팔원숭이의 꿈」) 긴 팔을 가졌음에도 인간은 스스로를 안아주기에도 부족하고 우리 삶은 너무 짧고 비루하기까지 한 것이다.
감히 이 땅에 생명을 내린 사탄아
싱그러움으로 세상을 삼켜버린 악한아
나는 뒤돌지 않겠다
오르페우스의 길을 거꾸로 돌아가
만찬을 즐길 테다
그대와 영영 작별하고는
인사 하나 없이
없었다는 듯이
떠날 것이다
「즉흥곡」 부분
시인은 때로 이렇게 거칠게 절망을 토로하기도 한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태양이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생명으로서 겪어야 하는 절망의 근원지도 태양이라 하겠다. 시인은 이 태양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모습이다. 절망한 자의 격한 몸부림이자 저항이다. “감히 이 땅에 생명을 내린 사탄아/ 싱그러움으로 세상을 삼켜버린 악한아”라고 태양을 향해 외친다. 시지포스가 다시 바위를 굴려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일처럼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을 뿐이 아니라 더욱 깊은 절망을 안게 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사람들은 하늘을 보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의 지적대로 ‘절망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절망’을 시인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절망의 실존을 외면하거나 모르는 상태를 시인은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사람들 틈에 섞여보니 비로소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라고 한다. “첫째는 그들에게 특별한 방향성이 없다는 것/ 둘째는 있어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 셋째는 보인다더라도 나에게 사영한 그들의 나아감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소해 보인다는 것”(「파편화된 투쟁」)이다. 방향도 없는 문명의 질주를 시인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절망에 저항하지 않는 수동적 삶에 시인은 다시 절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소한 것’으로서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절망이 더 깊어지는 까닭이다.
별빛은 땅바닥에 곤두박질쳤습니다
반짝임을 보아도 인공위성인가 합니다
불빛도 파동도
알코올에서 나올 뿐
혜성도 이젠 휘발유로 움직이니
대체 누가 천장을 보겠습니까?
아니,
사방이 검은빛으로 가득한데
어딜 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야경」 전문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문명을 일구어왔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심지어는 혜성도 휘발유로 움직인다고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시인은 냉소하고 있음을 본다. 천장을, 우주를 바라보지 않는 인간의 근시안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천장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그런 삶이/실제로 가능하다니/ 조각구름은 사진첩에/ 속삭임은 주소록에/ 시리우스는 구글에 있”(「거북목」)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놀란다. 하늘 대신 스마트폰만을 보고 있으니 거북목이 되어간다고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음을 알기 위해서 시인은 저 광막한 하늘을 보면서 절망해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코올에 취하여 절망을 회피하고 외면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시인은 절망을 마주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시인이 빅뱅 이전의 상태 “빅크런치를 꿈꾸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소망은 없습니다
어디선가 조금 자고 싶군요
어디 어디
어디라
어디일까요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감히 칭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로등과 벤치 오월의 낙엽 줄지어진 자동차와 공기 방울
추론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대, 그렇기에 그대가 필요합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한 감을 잡도록
제가 어디에 있든지 너울대는 바람을 보도록
그 바람결에 그대의 소식이 깃들도록
그러면 비로소 제자리가 잡히겠지요
그쯤 되면 비로소 어딘가가 생겨날 테고요
그때가 오면
그제야 조금
자고 싶군요
「원점」 전문
“어디 어디/ 어디라/어디일까요” 반복적으로 존재의 위치를 묻는다.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감히 칭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절규한다. 이는 절망의 몸부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그대와 그때를”를 갈구한다. 이 절망에서 빠져나갈 그때와 그가 의지할 그대를 기다린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말해줄 ‘어딘가’가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안식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성후 시인의 시에서 ‘그대’를, ‘그때’의 의미를 구명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하겠다.
시인에게 ‘그대’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완전하고 완벽한 절대자를 상정했다면 박성후 시인은 이데아를 그 자리에 놓았다. 사전의 풀이를 옮겨놓자면 이데아는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 플라톤에게서는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변한 실재(實在)”를 뜻한다. 플라톤에게서처럼 박성후 시인은 존재자의 원형을 이루는 영원불멸의 실재(이데아)를 절망의 구원자로 본 것이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영원하게
영원하길
「이데아」 전문
망원경을 통해 천장을 들여다보는 것도 시를 쓰는 것도 시인에게는 이 이데아를 위해서다. 참으로 간절하게 그 영원불멸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 보고 싶은 대상이 이데아이며 ‘그대’인 것이다. 마치 연인을 간절하게 그리는 마음으로 또 그런 말투로 시인은 이데아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은 이데아를 철학적 문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상징적으로 때로는 비유적으로 암시할 뿐이다.
시인은 절망의 장막 너머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 별빛은 구원의 빛이다.
별은 공백 덕에 빛난다
우주를 그려가는 하루
별과 별을 잇는
어둠
한 조각을
이제는 내려놓는다
햇살에 먹혀버린 거리 위에서
구멍을 뚫어 너머를 바라본다
대개는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릴지라도
한 번
단 한 번 별빛이 그 틈새로 반겨주기에
오늘도 송곳을 들고
하늘을 꿰뚫는다
「장막 너머」 전문
“햇살에 먹혀버린 거리 위에서/ 구멍을 뚫어 너머를 바라본다” 저 광막한 우주를 향하여 하늘에 구멍을 내고 어둠 너머를 바라본다. 현실과 실존의 절망 너머를 향하여 망원경으로 구멍을 내는 것이다. 그 일은 “대개는/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섬광처럼 “단 한 번 별빛이 그 틈새로 반겨”준다. 이데아를 경험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리라. 실존적 절망에 빠진 존재는 “어둠/ 한 조각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다. 구원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처럼 시인은 그 빛을 찾아 언제고 망원경을 천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은막’의 “커튼을 살짝/ 들춰본다” 그리고 거기서 “새벽을/ 거리를/ 햇살 타고 날아온 빛알이 뒤덮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차오르는 심장의 구름을 빼기 위하여” 시인은 “구멍을 뚫어야 했다” 구멍을 뚫는 행위는 현실적인 의미는 망원경으로 천장 너머로 눈길을 내는 것이고 비유적으로 말하면 미혹의 구름을 걷어내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은막 저 너머에서 시리우스 쌍성계를 발견하였다. 쌍성계는 “중력 상호 작용이 무게 중심을 중심으로 궤도 운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두 별로 이루어진 계”를 가리킨다. 이는 별이 존재하는 한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밤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가 바로 그렇게 존재한다.
그저 조금
추워서 떨었습니다
감히 기대야겠습니다
심장박동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지요
우리는 서로를 묶어두고 있다고
다가갈 수 없다면 도망치지도 않을 테라고
우리가 있기에
우리가 여기
있다고
살포시
손을 포갭니다
비록 늘 그럴 수는 없겠더라도
이명마저 죽은
이토록 고요한 겨울날에
「쌍성계에 관한 고찰」 부분
시리우스 쌍성계의 운행방식은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는 상호 의존적 존재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없으면 네가 없고 네가 없으면 내가 없게 되는 존재 방식이다. 상생과 공존의 원리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서로 인연으로 얽혀 있다. “우리가 있기에/ 우리가 여기/ 있다”라는 것을 시인은 발견한 것이다. 끊임없이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여기 있음에 관하여/어떤 해명도 내놓을 수 없”음에 절망하였는데 그는 이제 ‘여기 있음’에 대한 한 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시인이 시리우스 쌍성계를 통해 고찰한 바로 “우리는 서로를 묶어두고 있다고/ 다가갈 수 없다면 도망치지도 않을 테라고” 말한다. 인연으로 묶여있다. 그러니 “기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비록 늘 그럴 수는 없겠더라도” “살포시 손을 포갤”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은막 너머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한다. “지금이다/ 내일이 점지한 순간이다/ 어그러진 열망이 수축하다 못해 특이점을 넘고/영롱한 폭발이 섬광을 타고 이곳마저 덮쳐오는/ 겨울의 종말-/ 발아의 순간이다/ 먼지처럼 뿌연 머릿속에서/ 별 하나가 드러나는 때다”(「약속」)를 경험한다. 미혹이 걷히고 빛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여기 있음에 대하여 어떠한 해명도 찾을 수 없”었던 절망 너머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 “나를 안아주었다/ 사람의 온기가 오랜만이라/ 울었다/ 가만히/심장에 손을 얹었다/ 뛰고 있었다.”라고 (「짧은 팔 원숭이」)쓰고 있다. 자신이 발견한 빛의 언어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화해를 고백하는 것이다. 뛰고 있는 심장에 손을 얹고 울었다. 신생의 울음이다.
방향이 채 없어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사념들의 대개는,
사랑해요.
사랑했어.
사랑하였습니다.
고마웠다고,
이를 늘리는 것에 충분히 이바지해본다
과연 우주 전체가 너로 차오른다
그곳은 너의 눈동자 안일 뿐이다
「창조」 부분
실존적 절망 너머 시인이 발견한 언어는 바로 이런 것이다. 시인은 “차오르는 심장의 구름을 빼기 위하여/ 구멍을 뚫어야 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미혹과 절망의 구름을 걷어내기 위하여 천장 밖으로 망원경을 들이댔던 것이다. 망원경으로 구멍을 뚫고 우주를 들여다보고 시인이 발견한 언어는 사랑과 감사의 언어였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산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산다」) 는 보편적이고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가 발견한 이데아의 실체적 내용이기도 하다. 그의 실존적 삶과 시는 이 이데아를 우주 가득 늘리는 것을 소명으로 전개될 것이다.
스스로를 일러 “진리의 생도”(「낙관주의자」)일 뿐이라고 하는 시인의 시는 우주적 상상력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사랑을 재생산” 해내며 더욱 크고 넓고 깊게 확장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다음 시 한 편을 옮겨놓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그대가 이곳에 있음
그대에게 홀림
마음의 표명과
그려가는 미래들 속
단 하나 운명이란
사랑의 재생산
모든 우연을 한 방울씩 모아
문학으로 뚝딱 포장하면
그대에게 드릴 아름다운
운명 한 보따리 깨뜨렸습니다
물방울들이 튀어
그대와 저
우리를 적십니다
이로써 더 싱그러운 하루를 지낼 수 있겠군요
「국소적 운명론자 씨의 일일」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