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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374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3-12-15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근대사연구초
닫힌 문 저편의 소리
迷妄의 江
그때 우리는 갈까마귀 되어 날았다
나를 끌고 가는 끈 하나
비 울음
길 밖의 모노가미
가연佳緣, 먼 옛날의 약속
빗소리와 농민가
미도美道
빈 집
저자소개
책속에서
아래쪽에 역시 작은 붓글씨로 석전 이영재라는 서명이 보였는데 석전이 묵은 밭이라는 뜻을 지녔다는 사실을 그날에야 비로소 알았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으로 자처하며 살았던 아버지.
“법원 앞 건물하고 남평 땅은 강운이 몫으로 생각하고 있다. 네 형 연금은 나 죽으면 끊어지겠지. 요 십 년간 그 연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뒀으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세월이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뜻을 펴려면 돈도 있어야 했다. 이미 공증까지 마쳤다.”
총총한 정신으로 깔끔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던 아버지.
1년여 손자를 기다린 보람 없이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듬해 봄이 오기 전 세상을 떴다. 먼 곳에 있다면서 울먹이는 강운의 전화에 나는 잡히지 말라고만 했다. (「근대사연구초近代史硏究抄」 중에서)
푸르른 물이 흐르는 강, 그 강을 따라 이어지는 갈대밭과 파란 하늘이 이어지는 긴 둑, 형이 오랫동안 앉았던 그 자리에서 나는 맑은 소주를 마시며 울었다.
억새를 꽃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던가. 원색의 화려함을 갖추어야만 꽃이라고 여겼던 나에게 산과 들길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억새는 그냥 풀이었다. 봄날의 허기를 달래주던 풀도 아니었다. 여름에 그늘을 만들어 준 풀도 아니었다.
소도 피해가는 풀, 여린 듯 질긴 생명은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다가 화려한 꽃들이 시들고 말면 은빛 겨울 색으로 피어나 가을을 포근하게 하던 풀, 그 억새가 하얀 꽃으로 변할 무렵이면 가을이 깊어졌던 것을.
뒤늦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억새를 보며 나는 울었다. (「미망迷妄의 강」 중에서)
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고진감래라는 표현으로 부러워했다.
하지만 가끔 혼자만 들리는 가슴 밑바닥의 울림이 있었다. 내심 아내의 행태에 저항하면서도 안락과 여유로움에 안주해버린 현재 내 삶의 방식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또 가끔은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아내의 성화에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런 울림과 회의와 충동의 근원을 명조와 극락강을 헤맸던 시절 때문이라고 연결 짓지 않았다.
그날 이후에도 내 인생의 극적인 변화는 수없이 많았기에 그때 극락강의 만남과 현실을 연결 짓기 곤란하다고 무시해버렸다. 아내에게 내 추억을 말해주기보다는 단순히 경치가 좋은 곳으로 바람 쐬러 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은 가벼운 외출. (「그때 우리는 갈까마귀가 되어 날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