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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7403033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5-06-26
책 소개
『80억 분의 일』. 제목의 '일'을 숫자 1로 읽으면, 한 사람의 이야기다. 80억 인구 중 단 하나인 나는 아주 작고 작다(「먼지의 질량」). 나는 유일하지만, 동시에 80억 개의 1 중 하나다. 별것 아닌 듯한 일이 나를 움츠러들게 하지만, 그 '일'이 온 우주를 움직이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 책에는 남다른 이야기나 극적인 우여곡절이 없다. 고난을 극복한 사연이나 위로의 메시지도 없다. 오늘 끼니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끼의 니」), 꽉 막힌 도로에서 답답함을 느끼고(「운전」), 가족과 친구와의 여행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렇게 삶을 살아가는 작은 하나의 소중함을 말한다. 이름 없이 작은 일을 하는 이들을 위로하고(「위인」), 오직 사랑으로만 움직이는 살림의 가치를 알아보며(「살림의 사랑」),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삶에 '좋아요'를 누른다(「하지 않는 삶」).
'일'을 '활동, 경험'으로 읽으면 이는 곧 모두의 이야기다. 1은 곧 8,000,000,000으로 확장된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다 하나다. 그렇게 이 책은 같은 한 판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팬과 편」).
[청춘을 지나 어른으로, 세상과 삶을 눈 감아 보다]
작가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의 나이'인 서른 즈음이 되니, 세상은 서른에게 어른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고(「서른 어른」), 이제는 어른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다(「옛날 사람」). 그래도 계속 아이처럼 살 수는 없다. 어느새 들뜬 눈을 감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나이가 된 작가가(「반짝이는 것」) 세상과 삶에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이유다.
작가는 작은 틈으로 들여다본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이야기한다. 살면서 겪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늦을 날은 지하철을 타도 막히는, 살아 보니 깨닫게 된 이치들(「세상살이」), 사회에서의 해내야 하는 역할에 관한 고민(「i」), 달라지고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hello, world!」),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바꾸고 있는 정치의 본질까지(「정치민」), 작가는 때로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고, 거대한 담론을 꺼내면서도 거창하지 않다.
규섬의 글에는 순간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과, 시대와 세대를 해석하는 그만의 생각이 있다.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그가 눈을 감아 본 세상과 삶을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혹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온 독자라면 글 곳곳에 스며 있는 지난 세월의 풍경을 다시 읽는 재미도 있겠다.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읽는다는 것, 그를 읽는다는 것]
말보다 글이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스쳐간 순간, 스며든 생각을 조용히 종이에 써 내려가는 사람들. 규섬은 분명 그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글이 아닌 말의 시대, 침묵은 금이 아닌 죽음인 시대다. 수많은 말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재생되는 시대다(「말 귀」), AI가 몇 초 만에 문장을 쏟아내는 시대다. 작가는 수백 번 고치고 고민한 문장들에 과연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다(「직업」). 그럼에도 그는 글을 쓴다. 아무도 쓰라고 하지 않았지만(「돈 돌」), 그는 60편의 글로 첫 수필집을 꽉 채웠다. 글 쓰는 일은 꽃을 건네는 일이라며 그 꽃을 받아 줄 이를 기다리면서 말이다(「장미」). 작가의 말처럼, 글도 누가 읽어 주어야 글이다. 쓰기를 고민하지만 규섬은 분명 글을 즐기고, 맛을 낼 줄 아는 작가다. 문장과 문단 사이사이 숨겨놓은, 때로는 대놓고 드러내는 운율에 책을 읽는 내내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간다.
말보다 글이 가벼운 사람이 있다. 규섬의 글이 그렇다. 여기서 '가볍다'는 건 칭찬이다. 이토록 가볍게 읽히는 묵직한 책은 드물다. 새롭고 신나는 문장을 기다려온 이들에게 이 책은 망망대해를 떠돌다 만난 작은 섬처럼 반가울 것이다. 그 이름처럼, 규섬은 글이 빛나는 섬이다. 그 섬에 잠시 들르려던 독자들은, 꽤 오래 머무르게 될 것이다.
목차
순간/들 (1부)
바다
텃밭 농사
두부 장수
끼의 니
카메라
반짝이는 것
경복궁에서
미세먼지 좋음
오로라
개기일식
시골 가는 길
연락
스몰 토크
트로트와 클래식
키, 작은 사람
울대리
이름
엄마 맘
아버지 가 방
장미
얼죽아
여행 후에
마부작침
투수
서른 어른
도시를 떠나자
웃은 횟수
생일기분
12월의 서울
한 번 본, 다시 못 볼
생각/들 (2부)
사막
춤을 꾸다
긍정의 힘, 럭키
차례 상차림
많고 많다
장식
방화대교
먼지의 질량
말 귀
약한 마음
죽어 있는
철부지
살림의 사랑
자랑
운전
흉
돈 돌
hello, world
팬과 편
직업
위인
정치민
자유
i
취미
옛날 사람
하지 않는 삶
세상살이
무대에 서다
섬
저자소개
책속에서
「경복궁에서」
비 오는 날의 궁궐은 참 좋았다. 비의 소리가 폭신폭신 귀를 감쌌다.흙 풀 나무 향을 섞은 비의 내음이 물씬 코를 물었다.비를 쓰는 기와와 비를 입는 돌담과 비를 신는 박석과 비를 벗는 우산들까지, 옷을 갈아입히는 비의 진한 농에 걸으며 보는 내내 웃었다.누구의 말처럼 궁궐 관람은 가히 우중 궁궐(雨中 宮闕)이 제일일 것이다.
「오로라」
오로라는 불쑥 나타났다. 저녁을 먹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단걸음에 문을 박차고 나가 위를 보니, 세상에! 오로라가 아래로 쏟아지고 있었다. 도깨비불 같다고 해야 할까 광선검이라고 해야 할까. 불꽃들이 정신을 잃은 듯 미친 듯 날뛰고 있었다. (중략)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그들에게 그 불은 조상의 영혼이었고, 신의 속삭임이었으리라. 지금 우리는 오로라가 어떤 현상인지 잘 알고 있지만, 혼을 쏙 빼놓는 그런 불을 가만히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그때에도 지금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