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 봉쇄된 도시의 비극 1941~44 (봉쇄된 도시의 비극 1941~44)
애나 리드 | 마르코폴로
22,500원 | 20250925 | 9791192667980
레닌그라드, 인간 존엄의 마지막 빛
- 『레닌그라드: 봉쇄된 도시의 비극, 1941-1944』
겨울의 공기는 칼날 같고 침묵은 무겁다. 도시가 얼어붙는 동안 사람들은 걸음을 낮추고 마음의 온기를 서로에게서 빌려 쓴다. ‘봉쇄’라는 말은 한 줄의 역사 용어로 끝날 수 있지만, 애나 리드의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단어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는다. 굶주림의 무게, 빵 냄새의 기억, 낡은 일기의 누런 종이까지 손끝으로 더듬게 된다. 『레닌그라드』는 전쟁을 숫자와 지도로 환원하지 않는다. 도시 한복판의 고독과 연대, 비굴과 용기, 신념과 피로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복원시킨다. 그 목소리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다. 극한의 시절에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켰는가’라는 질문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우리에게 곧장 다가오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 봉쇄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872일간 계속되었다. 독일군은 점령이 아니라 고사(枯死)를 택했고, 시민들은 얼어붙은 라도가호를 건너는 ‘생명의 길’에 의존했다. 봉쇄 기간에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굶주림과 혹한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역사가의 건조한 문장 속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왔지만, 리드는 이를 다시 사람의 이야기로 되돌린다. 그녀의 책은 일기·회고록·구술 증언의 결을 따라 흘러간다. 그리하여 독자는 역사적 사실과 동시에 ‘사람’의 체온을 읽는다.
이 책의 미덕은 두 가지 결을 정교하게 직조했다는 데 있다. 하나는 사료적 엄밀함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적 감각이다. 저자는 군사기록 같은 공식 자료에 더해, 도시 안팎의 개인 일기와 가족 서한, 생존자 인터뷰를 촘촘히 엮는다. 편집의 리듬은 단단하고, 문장은 담백하다. 블룸즈버리는 이 책을 “봉쇄된 도시의 생활을 기록한 일기를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은, 몰입감 있는 역사서”라고 소개한다. 이 소개는 과장이 아니다. 독자는 ‘사건’이 아니라 ‘하루’를 지난다. 한 장, 또 한 장을 넘길수록 도시는 계절을 잃고, 사람들은 체온을 잃고, 그 사이에서 공동체의 존엄이 어떤 얼굴을 띠는지 선명해진다.
『레닌그라드』가 중요한 까닭은, 이 책이 사건을 환기시키는 방식 때문이다. 따뜻한 물 한 잔의 값어치가 달라지고, 낡은 모직 코트의 털 방향이 보이고, 빵 쿠폰의 질감이 두꺼워진다. 그것은 단지 재현의 기술이 아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순간, ‘인간다움’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빈 껍데기가 되어가는지, 또는 마지막까지 어떤 방식으로 지켜지는지를 묻는 윤리의 형식이다. 리드가 겨냥하는 지점은 영웅담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의 존엄, 아름다움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눈앞의 도시에 빠져들면서도 반복해서 현재를 떠올리게 된다. 생필품의 공급망은 얼마나 취약한가, 한파와 단전은 누구에게 더 가혹한가, 문화는 절망 속에서 어떤 방패가 되는가. 이 질문들은 결코 과거형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리드의 서술은 ‘신화 걷어내기’를 시도하면서 봉쇄의 영웅서사와 선전의 과장을 차분히 추적한다. 봉쇄가 ‘국가의 승리’라는 거대한 서사로 포장될 때 사라지는 개인의 고통, 정책 실패가 은폐하는 고통을 기록의 언어로 되찾는다.
이제, 한국 독자를 향한 질문으로 시선을 돌릴 차례이다. 왜 지금 이 책인가. 첫째, 『레닌그라드』는 ‘회복탄력성’이라는 낱말을 인간적 얼굴로 바꿔 놓는다. 재난과 전쟁, 팬데믹과 기후 위기의 시대에 도시와 공동체가 무엇으로 버티는지, 행정과 시민의 연대가 어떻게 맞물려야 하는지를 상시킨다. 둘째, 이 책은 기억의 정치에 개입한다. 누구의 목소리가 역사의 본문을 차지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각주로 밀려나는지, 어떤 고통이 기념비로 남고 어떤 고통이 사라지는지를 묻는다. 셋째, 개인의 양심과 공동체의 윤리가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내 몫의 빵을 나누었는가”라는 질문은 한 시대의 윤리경제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문장일지 모른다.
또한 이 책은 ‘문학적으로 읽는 역사’의 모범을 제시한다. 전쟁사는 종종 전술과 병력, 지휘관의 결단으로 요약되지만, 『레닌그라드』는 이를 생활사의 결로 뒤집는다. 난방이 끊긴 집에서의 밤, 외투 단추를 꿰매는 손가락, 누군가의 장례식이 사라진 도시에서 애도의 방식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러한 장면들이 역사의 줄기를 다시 쓴다. 읽는 동안 독자는 역사서 한 권을 ‘체험’한다. 그 체험은 통계표보다 오래 간다.
한국 독자에게 『레닌그라드』는 몇 겹의 필독 이유를 제공한다. 첫째, 도시와 시민을 보는 관점이 바뀐다.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자 주체이며, 그 주체성은 일상의 언어(일기, 쪽지, 메모)에서 태어난다. 둘째, 윤리적 상상력이 확장된다. 재난 시기 ‘공정’과 ‘분배’는 표어가 아니라 빵 조각의 실물에 가깝다. 셋째, 문화의 힘을 재발견한다. 낭독과 음악, 신앙과 교육이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는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문화 인프라와 생활 예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넷째, 기억의 언어를 배운다. 고통을 소비하지 않고 기리는 방법, 누군가의 상처를 나의 윤리로 환대하는 태도 등.
마지막으로, 번역 출간의 시의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재난과 불확실성의 언어를 과하게 배웠다. 그 언어는 때로 피로를 낳고, 때로 냉소를 부른다. 『레닌그라드』는 그 언어를 인간의 얼굴로 되돌린다. 불안과 공포의 숫자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바꾸고, 공동체의 존엄을 손에 잡히는 감각으로 보여 준다. 출간의 순간은 독서의 초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절망의 한복판에서 존엄이 어떻게 빛을 잃지 않는지를 배운다. 그 배움이야말로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