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예술미학 산책 (동아시아 문인들이 꿈꾼 미의 세계)
조민환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37,800원 | 20180228 | 9791155502709
동양 예술미학의 정원으로
산책을 권유하다
지난 30여 년간 동양의 미학과 그 예술정신의 탐구에 몰두해온 필자가 여러 지면에 발표해온 글들을 차분한 어조로 정리해 엮은 책이다. 눈앞의 예술작품들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해내면서, 필자는 이를 창작했던 조선과 중국의 문인사대부들의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과연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예술적 형상과 그를 빚어낸 예술적 언어, 그리고 그에 담긴 작가의 예술정신은 서로 동떨어진 채 이해될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동양 문인사대부들의 은일(隱逸)의 세계관에 대한 심층 분석이 이 책의 본류가 되고, 유가와 도가미학으로 크게 나뉘는 동양의 미학관, 품론ㆍ임모론ㆍ인품론ㆍ서화이론 등의 예술론, 쇄락과 광기 등 동양예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키워드들, 그리고 한국의 전통미를 비롯해 서양과 다른 동양 예술미학의 고유함과 본질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미학과 그 예술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새로운 지의 총화를 모색하는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의 학술 기획 총서 ‘지의 회랑’의 세 번째 책으로, 중국 현대미학의 개척자인 쭝바이화(宗白華) 교수의 ?미학산보(美學散步)?처럼 학술서의 깊이와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유유히 미학의 정원을 산책하며 읽는 에세이와 같이 자유로운 문장이 일품이다. 이제 여기 동양 예술미학의 정수를 채록한 스물세 편의 글 숲을 천천히 거닐어보자.
은일의 삶을 지향한
동아시아 문인들이 꿈꾼 미의 세계
중국에는 은사(隱士), 일민(逸民), 유민(遺民), 은자(隱者), 은군자(隱君子), 육침(陸沈), 은일(隱逸), 은둔(隱遁), 퇴은(退隱), 귀은(歸隱)을 비롯하여 고사(高士), 처사(處士), 일사(逸士), 유인(幽人), 고인(高人), 처인(處人) 등,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삶을 영위하는 문화가 있어 왔다. 대범함과 깨끗함, 고상함과 소박함이란 독특한 풍격을 지닌 은사들은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특징으로 삼고, 정신의 독립과 세속의 초탈이라는 이상적인 삶을 추구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과 처한 상황에 따라 유가적 삶과 도가적 삶을 함께 추구하거나 때론 도가적 삶에 치중한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삶은 쇄락(灑落)적 삶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찍이 범엽(范曄)이 ?후한서? ?은일전?에서 다양하게 은사를 분류한 이후 역대 중국의 정사에는 일민이나 은일과 같은 부류가 많이 보인다. 또한 정사 외에도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을 비롯해 ?일사전? 같은 부류의 저작들도 많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며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이름을 청사(靑史)에 길이 남기겠다는 포부를 가지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유가 속박 당하고, 심한 경우 몸에 욕됨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런즉 관직을 멀리하고 친자연하는 삶을 통해 존심양성(存心養性)하며, 한 몸을 온전히 보전하려는 이들이 있어 왔다. 공자는 자신이 처한 시대가 좋지 않으면 “은거하면서 그 뜻을 구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은거는 자연을 동경하면서 자연에서의 삶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했다.
경제적 빈한함에도 은사의 이러한 은일의 삶엔 결코 좌절이나 비통함이 없었다. 가난하지만 도리어 그들은 행복해했다. 그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빈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능력 있는 백수’로서의 삶이었다. 이런 은일의 삶은 조선조 시인이나 화가들에게 중요한 작품 소재가 되었고, 그들은 작품을 통해 우회적으로 은일과 쇄락한 삶의 기품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런 까닭에 동양예술에서는 기교의 최고 경지인 신품(神品) 이외에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정신’, ‘훌륭한 인품’, ‘탈속적이면서 은일 지향의 삶’ 등의 맥락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경지인 ‘일품(逸品)’을 더 높은 경지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는 동양에서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대할 때 단순히 기교 하나만으로 평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동양의 예술사를 보면, 간혹 기교를 어떤 측면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신품과 일품의 우열을 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일품을 신품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은 결국 기교 너머 또 다른 미적 경지가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는 작가의 탈속적이면서 은일한 삶,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모, 인품과 학식, 기운 등을 높이는 동양의 철학적ㆍ미학적 사유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전 장에 걸쳐 다양한 은사들의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예술적이며 그 자체로 미학적이었던 동양 문인사대부들의 은일한 삶의 기품을 다층적이며 심층적으로 분석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