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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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 7월 24일, 프랑스의 빌레르코트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1822년 파리로 가서 당시 권력이 막강했던 루이 필리프의 궁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생계가 안정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글을 써서 잡지에 실었다. 1829년 출간한 희곡 『앙리 3세와 그의 궁전』이 대성공을 거두자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이어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뒤마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역사소설에 집중했는데 1840년 출간한 『펜싱 마스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초석이 되었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철가면』을 잇달아 출판하였고 이 작품들이 크게 성공하면서 뒤마는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랐다.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반란에 의해 폐위되면서 그의 입지도 좁아졌다. 결국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했으나 곧 러시아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던 뒤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신문 「인디펜텐테」를 발간하고 이탈리아 왕국의 통일 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1864년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1870년 뇌출혈을 일으켜 불구의 몸이 되었고 결국 같은 해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그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었던 2002년, 프랑스의 최고 위인들만 묻힐 수 있는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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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A. 호프만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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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발자크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후기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호프만은 1776년 1월 24일 발트해 동남부 연안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되던 해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는 큰아들을 데리고 인스터부르크로 떠났고, 어머니는 막내 호프만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살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를 알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큰형과도 거의 교류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 작품 곳곳에 반영되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가문의 전통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법과 대학에 들어갔으나 법학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음악, 문학, 미술에 몰두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795년 사법 시험을 통과한 후 쾨니히스베르크, 글로가우,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 지방에서 법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침공 후 법관직을 잃고 밤베르크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의 교회와 극장을 옮겨 다니며 음악단장, 연출가, 극작가, 무대 화가로 일했으며 생계를 위해 개인 지도까지 했다. 1814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오페라 「운디네」가 대성공을 거두고, 첫 작품집 『칼로풍의 환상집』으로 ‘천재 작가’라는 명성과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낮에는 법원의 판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창작에 몰두했는데, 이 시기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푸케, 브렌타노 등 당대 낭만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세라피온의 밤’이라는 문학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822년 심각한 병을 얻어 전신 마비 상태에서 「사촌의 구석 창문」을 구술하며 집필 작업을 이어 가던 중 목까지 마비 증세가 왔고, 결국 6월 25일 타계했다. 주요 작품으로 『밤 풍경』, 『악마의 묘약』,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브람빌라 공주』, 『벼룩 대왕』, 『칼로풍의 환상집』, 『세라피온의 형제들』 등이 있고, 작곡가로도 활동하며 기악곡, 성악곡, 오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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