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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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비글호에서 탄생한 종의 기원》 《시튼 동물기》 《징비록》 《사기열전》 등의 학습 교육 만화와 《명성황후》 《연개소문》 《장희빈》 등의 역사만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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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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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푸시킨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소지주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친러시아적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정교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다. 10대에 러시아 낭만주의 문화를 접하기도 했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해 하급 관리로 생활하면서 낭만주의적인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를 발표한다. 이 설화집은 푸시킨, 주콥스키 등 당시 최고 문인들과 벨린스키 같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고골은 이내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는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을 수행하며 페테르부르크에서 역사 교사와 역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키예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에 지원하는데,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작가로서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1835년 초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 『미르고로드(Mirgorod)』와 문화-역사 비평 에세이들로 구성된 『아라베스크(Arabesques)』를 출간하고, 1836년에는 희곡 「감찰관(Revizor)」과 단편 소설 「코(Nos)」를 발표하면서 푸시킨과 함께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독자와 관객들이 「감찰관」을 사회 풍자 혹은 가벼운 소극(笑劇)으로만 인식하고, 일부 관객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개하는 데 상처를 받고 1836년 말 유럽으로 떠나 1848년까지 로마에 거주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842년에 장편 소설인 『죽은 혼』 1부를 발표했으며 이후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온 직후 모스크바에 정착하여 종교적인 정진에 힘쓰면서 2부에 전념하여 1851년 완성본을 탈고한다. 고골은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정교 수도사에게 『죽은 혼』 2부의 평을 부탁했으나 부분적으로 미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낙담해 원고를 불태웠다. 이후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고골은 정교의 대정진 기간에 금식을 극단적으로 수행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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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하우프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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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하우프(Wilhelm Hauff)는 독일의 시인, 소설가, 슈바벤 시파(詩派)에 속하는 낭만주의 작가로 1802년 11월 29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튀빙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가정교사로 생계를 꾸리다가 코타의 조간신문 편집장으로 일했다.
다재다능한 그는 작가로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적 요소가 버물어진 『유대인 쥐스』, 『리히텐슈타인 Lichtenstein (1827)』 같은 소설을 썼다. 특히 그의 『하우프 동화집』 덕분에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5세 생일을 앞두고 고향에서 짧은 생을 마쳤지만 그가 지은 노래와 작품에는 여전히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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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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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 프로방스의 님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완전히 파산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리옹의 앙페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알레스 공립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난폭한 학생들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갔다. 1859년 첫 시집 《연인들》을 출간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후 시인 미스트랄, 소설가 플로베르, 졸라, 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교류했다. 모르니 공작의 비서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자 작품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1862년 희곡 〈마지막 우상〉을 발표했다. 1868년 알레스 공립 중학교의 경험을 담은 첫 소설 《꼬마》를 출간했고 1869년에는 단편집 《풍찻간 편지》를 출간했다. 《풍찻간 편지》에는 도데의 대표적인 단편인 〈별〉, 〈아를의 여인〉 등이 실려 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에 지원하여 비참한 전쟁을 몸소 겪었고, 1873년에 출간한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에 패전국의 비애와 애국의 정열을 담은 〈마지막 수업〉, 〈소년 간첩〉, 〈기수〉 등을 실었다. 이외에도 섬세하고 감수성 풍부한 문체로 《타라스콩의 타르타랭》, 《자크》, 《나바브》, 《뉘마 루메스탕》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1897년 12월 16일 척추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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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A. 호프만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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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발자크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후기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호프만은 1776년 1월 24일 발트해 동남부 연안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되던 해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는 큰아들을 데리고 인스터부르크로 떠났고, 어머니는 막내 호프만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살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를 알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큰형과도 거의 교류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 작품 곳곳에 반영되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가문의 전통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법과 대학에 들어갔으나 법학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음악, 문학, 미술에 몰두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1795년 사법 시험을 통과한 후 쾨니히스베르크, 글로가우,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 지방에서 법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침공 후 법관직을 잃고 밤베르크와 라이프치히, 드레스덴의 교회와 극장을 옮겨 다니며 음악단장, 연출가, 극작가, 무대 화가로 일했으며 생계를 위해 개인 지도까지 했다. 1814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오페라 「운디네」가 대성공을 거두고, 첫 작품집 『칼로풍의 환상집』으로 ‘천재 작가’라는 명성과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낮에는 법원의 판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창작에 몰두했는데, 이 시기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푸케, 브렌타노 등 당대 낭만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세라피온의 밤’이라는 문학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822년 심각한 병을 얻어 전신 마비 상태에서 「사촌의 구석 창문」을 구술하며 집필 작업을 이어 가던 중 목까지 마비 증세가 왔고, 결국 6월 25일 타계했다. 주요 작품으로 『밤 풍경』, 『악마의 묘약』,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브람빌라 공주』, 『벼룩 대왕』, 『칼로풍의 환상집』, 『세라피온의 형제들』 등이 있고, 작곡가로도 활동하며 기악곡, 성악곡, 오페라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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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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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프랑스 항구도시 디에프 근처 미로메닐 성城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별거 이후 에트르타에 있는 어머니의 별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 경험한 노르망디의 대자연, 시골 사람들의 성정과 습성 등은 그의 작품의 배경과 소재로 자주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로서의 삶에 사표가 된 두 명의 스승, 시인 루이 부예와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만난다. 1869년부터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지만, 이듬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학업을 중단한다. 1871년 7월에 제대하여 1872년 3월 아버지의 소개로 해군성에 취직한다.
1880년 모파상은 에밀 졸라 등과 함께 소설집 『메당의 저녁Les Soirees de Medan』을 출판하고, 여기 수록된 「비곗덩어리」가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0년까지 10년 동안 30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과 6편의 장편, 5편의 희곡 등을 창작하며 플로베르, 졸라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10년은 육체와 정신의 병이 심각하게 나빠진 시기로, 그는 척추 통증과 시력 저하, 불면증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몇 번의 자살 기도 이후 1892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보내진 뒤 그곳에서 거의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1893년 7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 -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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