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문학앨범

식구들 모두 잠든 밤이면 태산이라도 움직일 듯한 힘이 내게 생기리라는 믿음은 밤이 주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부처처럼 앉아보내는 밤은 참혹하다. 무위하고 방만한 공상과 도피성의 독서, 때로 방문을 열고 잠든 가족들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기도 한다.

백지를 마주하고 밤을 세울 때 나는 자신이 천장 위를 달리는 쥐떼나 어둠 속을 소리 없이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보다도 정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고통의 제스처의 추함, 엄격한 자기 검증을 거치지 않은 언어의 추함. '엄마 어젯밤 어디서 주무셨어요?' 아이들이 묻는다. '떠돌았지. 유령처럼.' 아이들은 웃고, 나도 실없이 따라 웃는데 남편은 웃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식의 어사를 지나치게 겉멋부림이라고 생각하거나 위태로움이라고 여기도록 길러졌다. 물질의 낭비 못지않게 감정의 낭비도 악덕이라고 배워온 세대인 것이다. - 오정희, '내 인생 내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