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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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오몽녀」, 「아무일도 없소」, 「돌다리」 등을 저술한 소설가
아버지 이문교는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 근무한 지방관원이었는데, 당시 한말의 개혁파의 운동에 가담하였던 듯 수구파에 밀려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망명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려서부터 어렵게 수학하였다.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그 학교의 교원이었던 이병기(李秉岐)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았다. 그런데 학교의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결과 퇴교를 당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서 수학하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에 개벽사(開闢社) 기자로 일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이효석(李孝石)·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유치진(柳致眞) 등과 결성하였다.
이어 순수문예지 『문장(文章)』(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1925)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아무일도 없소」(東光, 1931.7.)·「불우선생(不遇先生)」(三千里,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新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1.)·「복덕방(福德房)」(朝光, 1937.3.)·「패강냉(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농군(農軍)」(文章, 1939.7.)·「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學, 1943.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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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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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평안남도 강동부에서 태어났다. 강동공립보통학교와 사리원공립농업학교를 거쳐 193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연희전문 재학 시절부터 시와 동요, 동극, 창작동화, 소년소설 등의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1934년부터는 ≪동아일보≫에 동화극 <쥐와 고양이>를 비롯해 동시 <시계>, 시 <송아지>, 동화 <새 새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1937년 11월 소년소설 <산울림>을 ≪가톨릭소년≫ 2권 9호에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가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구조는 창작뿐만 아니라 이론에도 힘을 쏟았다. 1940년 ≪동아일보≫에 <동화의 기초 공사>, <아동 시조의 제창>, <사실동화와 교육동화>라는 평론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아동문학평론가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40년 12월 예문관에서 이구조의 첫 동화집 ≪까치집≫이 발간되었다. ≪까치집≫에는 <꾀쟁이 토끼>, <과자벌레>, <조행 ‘갑’>, <청개구리 나라>, <그림책>, <달님공주>, <새 새끼>, <집오리> 등 스물한 편의 작품과 작가의 후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 뒤 이구조는 친구 김병서와 신촌상업학원을 설립하고 강사로 나가며, 아동문학가인 김영일과 사귀었다. 그러다가 1942년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하숙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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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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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한 후, 서울대, 국민대, 가톨릭대, 세종대 등에서 강의했습니다. 《삼성 주니어 필독선》과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지학사) 등을 집필했으며, (재)한국언어문화연구원의 수석 연구원과 국어능력인증시험 출제 위원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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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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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림을 전해 주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습니다. 주요작품으로는『해벽』,『이크호랑이가돌아왔다』,『 국회의원 나성실』,『 겨울 골짜기』,『 광개토대왕』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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