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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을 달리는 서울 지하철 : 1호선 여행

역사 속을 달리는 서울 지하철 : 1호선 여행

(우리 고전 속 역사 이야기)

김용인 (지은이), 전기윤 (그림), 김옥경 (감수)
한국고전번역원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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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을 달리는 서울 지하철 : 1호선 여행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역사 속을 달리는 서울 지하철 : 1호선 여행 (우리 고전 속 역사 이야기)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초등 한국사
· ISBN : 9788928404131
· 쪽수 : 116쪽
· 출판일 : 2016-09-08

책 소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철도 노선인 서울 지하철 1호선 주변에 있는 문화 유적들을 살펴보는 역사 여행 책이다. 서울역과 청량리역을 잇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역 주변에 있는 문화 유적과 그곳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역사 문헌에서 찾아 재미있게 전해 준다.

목차

여는 글

1 서울역 최부가 『표해록』을 작성했던 청파역
2 시청역 중국 사신을 접대했던 태평관
3 종각역 조선 상업의 중심지 운종가
4 종로3가역 왕과 왕비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종묘
5 종로5가역 두 임금을 낳은 어의궁
6 동대문역 서울 방어의 핵심 성문
7 동묘앞역 전쟁의 신 관우를 모신 동관왕묘
8 신설동역 의병의 길, 항일의 길 왕산로
9 제기동역 임금과 백성의 농사 축제 선농단
10 청량리역 명성황후의 한이 서린 무덤 홍릉

우리 함께 역사 여행을 떠나 볼까?

저자소개

김용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어려서부터 빈 지도 위에 지명을 써 넣거나 지도에서 숨은 지명을 찾는 놀이를 하며 자랐습니다. 대학에서 한국사를 전공하고, 졸업 후 역사 정보 및 한국학 자료를 정보화하는 일에 힘써 왔습니다. 현재 전국의 향토 문화 콘텐츠를 인터넷 사전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역사 속을 달리는 서울 지하철 - 1호선 여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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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윤 (그림)    정보 더보기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그림과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린 책으로 『어린이 백범일지』, 『장영실, 노비에서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정약용, 이론을 실천한 학자』 등이 있고, 만화책으로 『천문학 이야기』, 『오페라 투란도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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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경 (옮긴이)    정보 더보기
경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역사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상임연구부를 졸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 재직 중이 다. 《일성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번역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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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지금 서울역 근처에는 고려 시대부터 교통과 통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청파역이 있었어. ‘청파’는 근처에 푸른 언덕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야. 청파역 일대에는 역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역촌이 형성됐었지.
청파역은 서울과 지방을 이어 주는 기능을 했어. 관리들은 청파역을 통해 각 지방으로 출발하기도 하고, 각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기도 했어. 이 청파역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남아 있었단다.

하지만 최부는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단다. 그때는 표류해서 외국에 다녀오면 반드시 일기 형식의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거든. 조정에서는 이 보고서를 통해 표류한 사람이 겪은 일을 파악했어. 외국의 정세는 어떠한지, 혹시 이 사람이 외국의 첩자가 된 것은 아닌지를 알아 본 거야. 중국에서 돌아온 최부 역시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단다.
최부는 아버지의 상을 치르지도 못한 채 청파역에 8일간 머무르며 표류의 전 과정과 중국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낱낱이 기록했지.
「서울역-최부가 《표해록》을 작성했던 청파역」 중에서

종각은 조선 시대에 시간을 알리는 종을 설치했던 누각이야. 종각에 설치된 종은 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해 쳤고, 성안에 큰불이 났을 때 치기도 했어. 종각이 있는 이 길을 조선 시대에는 종길, 종로, 또는 종루가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리’라는 뜻에서 운종가라 하기도 했단다.
운종가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상점 거리였어. 종각을 중심으로 지금의 종로 일대에는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었지. 이 상점들은 조선 초기에 관청이 주도해서 지었단다. 왜 나라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상점들을 지었을까? 그건 아무나 이곳에서 장사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어. 나라에서 시장 상인들을 통제한 거지.
상점에서는 허가받은 사람이 허가받은 물품만을 팔 수 있었어. 이렇게 허가를 받아 장사하는 상인을 ‘시전 상인’이라 하고, 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인을 ‘난전 상인’이라고 했어.
「종각역-조선 상업의 중심지 운종가」 중에서

당시 단종은 대역 죄인이라서 무덤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단다. 그렇다면 단종의 시신은 어디로 갔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엄흥도라는 선비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는 엄흥도가 만든 무덤을 보수한 거라고 전해진단다. 그런데 이 밖에도 어떤 중이 시신을 지고 가서 산골에서 화장했다거나 강에 던졌다는 기록도 있어. 지금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려 어떤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
단종이 죽은 후 240여 년 뒤 숙종은 단종의 지위를 되찾아 주기로 하고 종묘에 위패를 모셨단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던 단종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단종뿐 아니라 종로3가의 종묘에는 갖가지 사연을 간직한 왕과 왕비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단다.
「종로3가역-왕과 왕비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종묘」 중에서

성문 중에서 동대문은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이었어. 경기에서 생산된 식량과 물자들이 한강을 따라 광나루에 도착하면 수레에 실어 동대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여왔거든.
그런데 동대문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아서 적을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단다. 따라서 동대문에 연결된 성벽에는 치성을 설치했어.
치성은 성벽의 한 부분을 밖으로 툭 튀어나오게 쌓은 것이야. 치는 꿩을 뜻하는 한자인데, 꿩이 자기 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이것의 이름을 치성이라고 지은 거래. 치성이 있으면 성벽 가까이에 붙은 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어. 적군이 성벽에 기어오르거나 가까이 붙어 있으면 성안에서는 적군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밖으로 툭 튀어나온 치성이 있으면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기가 쉽지.
「동대문역-서울 방어의 핵심 성문」 중에서

동묘는 중국 삼국 시대 촉나라의 유명한 장수였던 관우를 모신 사당이야. 정식 이름은 동관왕묘인데, 서울의 동쪽인 동대문 밖에 세웠기 때문에 동묘라고 해. 동묘는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로 1602년(선조 35)에 세워졌단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관우를 관왕으로 높여 부르고 신으로 모셨어. 용감한 장수였으나 억울하게 죽은 관우에게 영험한 기운과 신령스런 힘이 있다고 믿은 거야. 전쟁터에 나갈 때는 승리를 기원하며 관왕묘에 인사를 드리고 나갔어. 또 전쟁이 끝나면 잘 싸우고 무사하게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인사를 드렸지. 중국 사람들에게 관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매우 중요한 신이었던 거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어.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들은 왜군을 물리치는 데에도 관왕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단다.
「동묘앞역-전쟁의 신 관우를 모신 동관왕묘」 중에서

허위는 서대문 감옥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했어. 그 후 허위에 관한 신문 기사에서는 이렇게 말했어.
‘하늘에 뜬 해가 빛을 잃었다.’
이 기사를 본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어.
“아까운 사람이 갔구나. 조선의 앞날이 걱정이로다.”
서대문 감옥을 지키던 옥졸 두 사람도 허위가 처형된 것을 보고, 분하고 슬픈 마음에 모자를 찢고 옥졸을 그만두었단다.
“일본의 졸개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왕산 허위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애국심과 변하지 않는 절개는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남겼단다. 신설동역에서 만날 수 있는 왕산로는 허위가 결사대 3백여 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했던 바로 그 길이란다.
「신설동역-의병의 길, 항일의 길 왕산로」 중에서

임금이 밭 가는 일을 보필하는 경적사 김치인이 추수한 기장을 바치자, 승지 정광한이 받아서 제사 때 쓰는 작은 상 위에 올려 들고 왔지. 영조는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기장을 받았어. 경적사가 또 추수한 벼를 바치니, 이번에도 영조는 자리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받았단다. 곡식이 소중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거야.
모든 행사가 끝나자 영조는 행사에 참여한 노인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에게 무명을 선물했어.
백성들에게 농사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임금이 선농제를 지내고 직접 경작하는 의식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1909년(순종 융희 3)에 행한 것을 끝으로 폐지되었단다.
지금 제기역 근처 선농단에는 돌로 만든 제단이 남아 있어. 동대문구청은 선농제를 복원하여 해마다 농사가 시작되는 4월이면 이곳에서 선농제를 지낸단다.
「제기동역-임금과 백성의 농사 축제 선농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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