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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88928645831
· 쪽수 : 380쪽
목차
옮긴이들의 말
『교부와 만나다』 신판 서문
들어가며
1.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I. 그리스도교 문헌의 탄생
1. 유대계 그리스도교 저술
2. 최초의 사목 서간들: 선교하는 교회
II. 신앙과 문화의 만남: 호교 교부
1. 『디오그네투스에게』
2. 평신도 신학자 유스티누스
III. 리옹의 이레네우스
1. 영지주의가 불러온 위기
2. 이레네우스의 가르침
3. 리옹의 순교자들
2. 순교자들의 교회
I. 피로 쓴 서사시
II.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사상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2. 오리게네스: 말씀의 몸인 성서
III. 북아프리카 그리스도교인들
1. 하느님의 투사 테르툴리아누스
2.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
3. 인문주의자 그리스도교인: 락탄티우스
3. 황금기
I.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1.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
2. 신학의 위기: 아리우스주의
3. 교회 공동체 내부의 삶
II.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
1. 오리게네스의 제자
2. 콘스탄티누스의 신임을 받은 사람
III. 동방으로 퍼져 나간 그리스도교
1. 성령의 악기, 에프렘
2. 시리아 신학의 증인, 에프렘
3. 에프렘의 작품들
IV. 그리스도교의 땅 이집트
1. 이집트 수도승 생활의 탄생
2.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
V. 증언의 도시 예루살렘
1.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2. 순례의 중심지 예루살렘
VI. 카파도키아의 광채
1.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3.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VII.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인들
1.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2.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VIII. 서방과 갈리아의 부흥
1.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와 갈리아
2. 진정한 사목자 암브로시우스
3. 이탈리아의 다른 저술가들
4. 수도승이자 성서 주석가,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
IX. 라틴 시문학의 발전:
다마수스에서 세둘리우스까지
1. 다마수스 교황
2. 히스파니아 출신의 프루덴티우스
3. 놀라의 주교 보르도의 파울리누스
4. 세둘리우스
X. 서방의 영광, 아프리카인 아우구스티누스
1.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
2. 신학 논쟁
3.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4. 비잔티움 문화와 중세를 향하여
I. 서방 라틴 교회
1. 갈리아 그리스도인들의 활약
2.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활동과 문화의 수호
3. 이베리아와 서고트
II. 동방의 그리스도교 세계
1. 위-디오니시우스
2. 가객 로마누스
3. 고백자 막시무스
4. 다마스쿠스의 요한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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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교회는 유대교의 기도 양식을 보존했다. 신앙고백, 찬양 기도문, 시편, 메시아 예언 같은 양식은 모두 유대교 기도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초대교회의 전례는 유대교 회당 전례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세례 예식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치르는 개종 예식에서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식사하며 거행하던 성찬에는 『디다케』Didache가 보여 주듯 유대교의 식사 기도문을 사용했다. 『디다케』는 회당에 있던 몇몇 직무를 언급한다. 예언자와 교사가 있었고(13장과 15장),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공동 지도체제로 이끌던 장로도 있었다.
편지는 공동체와 공동체, 지방과 지방, 그리고 목자와 신자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했다. 각 지역 교회들은 서로의 일치를 돈독히 하기 위해 편지를 썼는데, 소식 교환에서 훈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함했다. 최초의 편지는 주로 바울계 공동체들을 맡고 있던 주교들에게서 나왔는데, 이들은 부제를 보조자로 두고 있었다. 유대교의 회당 조직과 초대교회의 교계 제도는 얼마간의 모색기를 거친 후에 서로 통합되고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황제가 베풀어 준 보호와 특권, 혜택은 교회를 로마 권력과 묶어줌으로써 제국과 한통속이 되게 하였고, 세금으로 허덕이던 민중으로부터 교회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국의 비호와 특혜가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가 교회 내부 일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니케아의 황궁에서 첫 번째 보편 공의회를 소집했을 때 교회가 치른 대가는 무거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