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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27173
· 쪽수 : 302쪽
책 소개
목차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파르마코스
관통貫通
이창裏窓
식우蝕雨
이물異物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어디까지를 묻다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우리에게 하이라는 놈은 옛이야기 속의 바보 셋째나 미친 막내가 그랬듯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나 무리수에 우리 대신 자신을 인신공양하여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
나는 언제라도 필요할 때 현실의 공간을 탈출하여 다른 세상을 방문할 수 있는 하이를 경이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그 어떤 동기도 열쇠도 없이 자의적인 방문도 이동도 불가한 데다 공간 자체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세계였으나 그게 바로 지금, 바로 여기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_「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에서
이것이 당신이 알고 싶어 했던, 오랜 세월 물에 잠겨 그 자체로 거대한 저수지가 되어버린 마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 밑에서 온갖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썩어가면서 물은 검게 변하고 시종 끈적거릴 테니 그것이 사람이 쓸 수 있는 저수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겠네요. 나는 그 뒤로도 살아 있는 날들 내내 소리 내어 기도를 하거나 혼잣말을 반복했으니 물은 부지런히 빠져나가면서도 원래의 수위를 유지해왔을 테고요. 당신이 문간에 들어서면서 본 더러운 먼지와 검댕 들은 모두 방치된 벌레들이 죽어 말라붙거나 가루로 부서져버린 흔적이랍니다.
_「파르마코스」에서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이런 때가 아니면 자신의 답 없는 인생에 언제 다시 루초 폰타나의 그림을 꿰뚫고 지나가보겠냐며, 미온은 실소하며 칼자국 안으로, 손짓하듯 너울거리는 어둠 속으로 한쪽 다리를 깊이 밀어 넣었다.
_「관통貫通」에서
비로소 두 사람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단지 침묵을 유지하고 손해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를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며 어디의 무엇인지조차 알아보지 않으려 했던 털 뭉치의 정체가 실은 지극히 조용한 침입자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것인데, 이렇게 목전에 구체화되는 경우가 흔치 않다뿐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
_「이물異物」에서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버리게 되는 걸까요?
_「어디까지를 묻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