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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가톨릭 > 가톨릭 신앙생활
· ISBN : 9788932112497
· 쪽수 : 600쪽
· 출판일 : 2011-12-06
책 소개
목차
양말 서랍 속의 성인
하느님의 아이 ─ 잔 다르크
내면의 드라마 ─ 리지외의 데레사
참된 자아 ─ 토마스 머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 로욜라의 이냐시오
더욱더 ─ 페드로 아루페
마사비엘 동굴 ─ 베르나데트 수비루
그대가 만나는 모든 이와 이 기쁨을 함께 나누라 ─ 마더 데레사
그리스도의 대리자 ─ 요한 23세 교황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 ─ 도로시 데이
나는 죄인이니 ─ 베드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된 이들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숨은 생활 ─ 요셉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 ─ 우간다 순교자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 ─ 알로이시오 곤자가
은총이 가득하신 분 ─ 마리아
다른 형태의 성스러움 ─ 결론
책속에서
여타의 성인전과는 다른 빛나는 통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살아 있는 성녀’로 지칭되던 여인은 당연히 하느님의 현존을 기쁘게 감지하며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은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힘겨운 봉사가 남은 우리의 경우보다 쉬웠을 것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우리가 누리지 못한 위안과 확신을 하느님에게서 끊임없이 누렸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그런 종류의 일을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런 일은 한결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쉽게 해내는 마더 데레사 같은 사람에게 맡기라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로 밝혀졌듯,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들과 일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일이 우리에 비해 조금도 ‘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누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힘들었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 기도가 항상 쉽고 감미롭고 위안이 된다고 느낄 수 있게 되면, 틀림없이 아주 멋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인들이라면 누구나 그저 눈만 감으면 보상으로 당장 포근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최후의 병마와 싸우는 동안 나름대로 ‘어두운 밤’에 몸부림친 리지외의 데레사를 포함해 긴 대열을 이루는 성인들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고, 마더 데레사의 경우만 보아도 결국 성인들은 남은 우리와 정말 똑같고, 심지어 우리가 전혀 의심하지 않는 부분인 영성 생활에서까지 우리와 다름없이 온갖 방식으로 허덕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더욱 심하게 몸부림쳐야 하는 때도 있다.(……)
마더 데레사가 영성 생활 면에서 몸부림쳤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내 눈에 그녀가 이룩한 업적이 한결 놀라워 보이고 그녀의 모범이 큰 의미를 갖게 해 주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사실이 그렇듯이 유례없이 친밀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토대가 되지만, 그 만남이 오랜 세월이든 평생이든 갈수록 침묵으로 잦아드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녀의 사도직 활동은 충절을 입증해 주는 놀라운 증거가 되고 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이 지닌 이런 단면만큼 나를 그녀와 단단하게 묶어 주는 것이 없으며, 내가 글이나 강론 또는 피정의 자리를 빌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녀의 성덕을 식별하는 그들의 이해 능력이 어느 때보다 심화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 ‘그대가 만나는 모든 이와 이 기쁨을 함께 나누라’, 마더 데레사(263~268쪽)
진솔한 자기 고백적 체험들
나는 절망했다. 동료들 대부분은 예정대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뒤에 남으라고 지시받은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체면에, 그리고 이 사태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에 신경이 쏠렸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실패작이었다. 불량한 예수회원이었다. 손상된 상품이었다. 나는 우리 관구장에게 화가 났고, 그 점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나이로비에 있는 내 영성 지도자에게 이런 감정을 토로하자, 그는 인내뿐 아니라 그가 말하는 이른바 무심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까지 종용했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자네는 예정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할 수는 없겠나? 실제로 자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보다 이 일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에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은가? 하느님의 예정표가 자네의 그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무심을 되새기게 만든 그의 조언은 내가 짧지만 강력했던 영적 폭풍을 뚫고 나가도록 도와주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예수회 잡지 《아메리카》에서 일하며 추가로 보낸 한 해는 작가라는 새로운 경력을 꿈꾸도록 도와준 시기로 내 생애에 경이로운 시기였고, 신학 공부를 충실히 준비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다.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로욜라의 이냐시오(131~132쪽)
나는 예수회에 들어가면서 순명이 서원 가운데 가장 쉬울 것으로 예상했다.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하고 아주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일 청빈은 분명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정결 역시 커다란 도전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적 친교 없이 살아가면서 걸핏하면 외로움에 시달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명은 그 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하라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하라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장상들로부터 교회 안에서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주제는 다루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나는 토마스 머튼의 말과 페드로 아루페의 표양을 생각하며 내 순명 서원을 충실히 지키고 싶었기에 그 같은 결정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이런 문제를 보다 자유로이 글로 다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 ‘더욱더’, 아루페(190쪽)
수련장의 말은 옳았다. 내가 예수회원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런 일이 한 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피하고자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음에도 한 사람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수련기를 끝내고 몇 년이 지나 나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내 사랑의 깊이와 내가 느낀 정열은 예상 밖이었고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누구나 이해하겠지만, 일종의 격동기였다. 몇 주일 동안 나는 이 사람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사람이며 내가 여생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상사병’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고, 제대로 먹거나 잘 수도 없었다. 이런 기분에 뒤섞여 나타난 것은 이 모두가 내가 예수회를 떠나야 한다는 징후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런 혼란의 와중에 나의 영성 지도를 맡고 있는 슬기롭고 노숙한 예수회원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눈물을 펑펑 쏟고서야 털어놓은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그런 다음에 들려준 답변은 우리 수련장이 해 주었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인간이 갖는 경이로운 요소이며, 어쩌면 자네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면모일 게야. 이번 일은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임을 증명해 주고 있네. 이것이야말로 예수회원에게 그리고 사제에게 경이로운 일이라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해야만 하네. 자네는 자유로이 예수회를 떠나 이 관계를 추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에 남아 관계를 청산할 수도 있네.”(……)
독신 생활은 쉽지 않다. 사람이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에 빠져들 가능성이 커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빠져들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커진다. 독신 남녀는 서로에게 홀딱 반하고, 사랑에 빠지는 등 다른 인간이 걸려드는 일에 쉽사리 걸려든다.
- ‘그리스도의 대리자’, 요한 23세 교황(313~315쪽)
성인들의 전구는 어떤 효과를 내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들에게 전구하는 것을 미신으로 보기도 한다. 촛불과 성상, 메달, 기도 모두가 마술의 주문처럼 수상쩍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구를 신앙의 토대 중 하나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사도 신경에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나의 경우는 성인들의 도움을 실천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 하느님과 함께 지내는 이들이 지상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싶어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내게는 그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증명할 길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어떤 성인에게 도움을 청하고 기도했다가 청한 것을 받았을 때, 우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만 그 성인이 어떤 형태로든 내게 베풀었을 특별한 도움에도 감사드린다는 것뿐이다.
- ‘다른 형태의 성스러움’, 결론(576~5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