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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역사
· ISBN : 9788952238481
· 쪽수 : 228쪽
· 출판일 : 2018-05-15
책 소개
목차
머리말|분열과 혼란 속에서 중국인이 선택한 길은?
제1장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서다
01 상나라의 쇠퇴
02 주나라의 성장
03 주 문왕의 등장
04 문왕, 시련을 극복하고 인재를 등용하다
05 주의 상나라 정벌
플럽러닝|때를 기다리니 능력을 펼칠 기회가 오누나
세계사 바칼로레아|네 지역에서 먼저 문명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2장 주의 정치적 발전
01 주 초기의 정치 불안
02 협력의 통치 제도 ‘봉건제’를 시행하다
03 왕과 제후의 연결고리, 책봉과 조공
04 관직으로 살펴보는 주의 통치 제도
플럽러닝|봉건제의 시작은 승자들의 이익 나누기
세계사 바칼로레아|주나라와 그 제후국들은 지금 국가들처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일까?
제3장 주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대외관계
01 땅에서 시작해 땅으로 끝나는 주나라 경제
02 농민의 생산경제와 지배층의 소비경제
03 국가 제도와 법률로 본 주나라의 생활
04 주나라의 대외관계
05 주의 쇠퇴와 멸망, 그리고 또 다른 주의 등장
플립러닝|생각보다 주나라 외교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다?
세계사 바칼로레아|공화 정치는 주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제4장 춘추 시대의 전개
01 동주의 성립과 제후들의 세력 확대
02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춘추 5패 (1)—제와 초
03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춘추 5패 (2)—진(晉)과 진(秦)
04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춘추 5패 (3)—오와 월
05 춘추 시대 사방의 이민족들
06 춘추 시대의 사회와 경제·문화
플립러닝|절대 불가능한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끝은 파국
세계사 바칼로레아|왜 제후들은 쇠퇴한 주나라를 곧바로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제5장 전국 시대의 전개
01 춘추에서 전국으로—하극상, 혹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
02 전국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 (1)—철기 보급 확대와 농업 발달
03 전국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 (2)—상공업의 발달
04 전국 7웅의 부국강병 노력 (1)—위나라·초나라
05 전국 7웅의 부국강병 노력 (2)—제나라·한나라·진(秦)나라
06 전국 시대 각국의 통치가 갖는 의미
07 천하 차지를 위한 전국 7웅의 치열한 전쟁
08 진나라의 전국 시대 통일
09 전국 시대의 사회와 문화
플립러닝|손빈의 병법, 감조지계
세계사 바칼로레아|상앙도 피해가지 못한 악법,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맺음말|넓은 중국 땅을 사이좋게 나누어 통치할 순 없었을까?
연표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하던 상황이나 주나라의 제후국이 분포된 상황을 볼 때,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와 좀 다른 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여러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도시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국가들은 어떤 형태였을까.
중국·한국 등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것을 ‘읍’이라고 불렀다. 읍의 크기는 다양했는데, 상나라의 경우 왕이 사는 지역을 대읍, 여러 집단이 사는 좀 더 작은 지역들을 족읍·속읍 등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중국의 성읍 국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서양의 역사에 있었던 그리스·로마의 도시국가를 떠올려볼 수 있다.
한편 주나라에는 국가 통치에 기본이 되는 법률이 제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의 법률, 특히 형벌은 만든 사람으로 문왕이 언급되고 있다. 즉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기 이전부터 죄인에 대한 처분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에는 주나라에 형벌에 관한 서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도(盜)이고, 나라의 중요한 물품을 훔치는 것은 간(奸)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도둑질에 대해 구체적으로 여러 경우를 밝히고 있다는 것은, 당시 주나라가 사유 재산을 존중하고 잘 지키는 데에 신경을 썼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나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물품 중에는 왕·제후·경과 대부를 상징하는 귀중품(인장과 같은 물건)이 있었는데, 이것을 잘 지키는 것이 당시의 봉건제를 문제없이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주나라에는 다섯 가지 형벌이 있었으며, 세부 항목이 무려 3,000여 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다섯 형벌은 죄인이라는 표시를 몸에 새기는 묵(墨)형,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 발꿈치를 베어버리는 비(?)형, 거세에 처하는 궁(宮)형,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형을 가리킨다.
이렇게 자세하고 잔인한 형벌의 내용은 그만큼 주나라의 형법 제도가 죄지은 사람에게 혹독하게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러 기록과 청동기 명문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지배층에 속한 사람들은 형벌을 직접 받지 않고 금전을 대신 내는 것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주나라의 신분 질서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유지되면서 지배층의 특권이 보장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의 제2대 국왕인 성왕부터 강왕·소왕·목왕·공왕(재위: 기원전 922년경~기원전 900년경)이 통치했던 시기가 주나라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제7대 의왕(재위: 기원전 900년경~기원전 892년경) 때부터 여러 모순이 나타나면서 주나라의 국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무엇보다도 한 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중요한 원인은 바로 지배층의 권력 다툼과 그로 인한 정치 혼란이다.
제9대 국왕인 이왕 때 제후들이 천자를 보러 오지 않거나 천자 앞에서 서로 다투고 대립해도 왕이 막을 수 없었다고 한 기록이 대표적인 예이다. 설상가상으로 제후들이 왕에게 인사를 한다 하더라도 왕이 자신의 자리에서 절을 받지 못하고 제후들이 서 있는 곳으로 내려와야 할 정도로 왕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봉건제는 왕과 제후들이 혈연으로 이어진 동시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돈독한 유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세월의 흐름이었다. 왕과 제후의 지위가 그 후손에게 전해지는 순간 친·인척의 거리는 멀어지는 것이다. 형인 국왕과 아우인 제후가 죽고 그의 아들들이 뒤를 잇는다면 사촌지간, 또 그 아들들이 계승하면 6촌·8촌 등으로 멀어져 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엷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제후국의 자립성이 강화되어갔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