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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 이야기

하용조 목사 이야기

(온누리교회와 함께 쓴 Acts29)

문성모 (지은이)
두란노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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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 이야기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하용조 목사 이야기 (온누리교회와 함께 쓴 Acts29)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53113992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10-10-08

책 소개

하용조 목사의 설교와 목회와 선교사역의 모든 것을 서울장신대 문성모 총장이 일목요연하고도 감동 넘치게 들려주는 책이다. 하용조 목사가 사도행전 29장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설교자와 목회자와 선교사로서 살아온 삶과 비전을 조명하면서, 그와 함께한 온누리교회의 25년간의 사역을 정리하고 있다.

목차

감사의 말… 6

시작하는 말… 8

제1장
준비된 그릇
하용조 목사 이야기… 16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훈련 받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긍휼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무장하다
3. 지(知), 정(情), 의(意)의 조화로운 신앙 인격으로 준비하다

제2장
설교자 하용조 목사 이야기… 42
1. 강해설교
2. 사도행전적 설교
3. 설교의 실제를 위한 제안
4. 복음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걸음

제3장
목회자
하용조 목사 이야기… 98
1. 처치(Church)와 파라처치(Para-Church)의 조화와 균형
2. 목회자와 평신도의 조화와 균형
3. 말씀과 찬양과 성만찬의 조화와 균형
4. 예배와 선교의 조화와 균형
5. 전도와 양육의 조화와 균형
6. 복음과 문화의 조화와 균형
7. 구령(救靈)사역과 긍휼(矜恤)사역의 조화와 균형
8. 헌신의 삶과 윤리적 삶의 조화와 균형
9. 영성과 지성의 조화와 균형
10. 방학이 없는 온누리교회 목회 현장

제4장
선교사
하용조 목사 이야기… 192
1. 보내기 위해 세운 교회
2. 2천/1만 선교 비전
3. Acts29의 비전
4. 러브소나타의 비전
5.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비전

제5장
하용조 목사에게 듣는다
25문 25답… 240

제6장
하용조 목사를 말한다
25人 25色… 262

끝맺는 말… 296
부록 - 온누리교회 25년 사역 일지… 304
참고문헌… 354
하용조(河用祚)목사 연보(年譜)… 410

저자소개

문성모 (지은이)    정보 더보기
문성모 목사는 2004년 대전신학대학교 총장 재직 시절에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이자익 목사를 처음으로 한국교회에 소개하였다. 『대전신학대학교 50년사』를 발간하면서 그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초대 교장 이자익 목사를 조명하였고, 교회사학자 김수진 목사에게 이자익 목사 전기(傳記)를 의뢰하여 『이자익 이야기』를 출간했고, 대전신학대학교 내에 '이자익 사료관'을 설치하여 그의 유품을 한곳에 모았다. 또한 ‘이자익 목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격년으로 ‘이자익 목회자상’ 수상식을 거행함으로써 이자익 목사를 기념하는 사업을 계속하였다. 대전신학대학교 총장,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광주제일교회 목사, 강남제일교회 목사로 섬겼다. 경력으로 한국기독교학회 회장, 한국실천신학회 회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한국신학대학총장협의회 회장, 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이사장, 광나루문인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대학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작년에 류철랑 명예 이사장의 뒤를 이어 현재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한국찬송가개발원장으로 찬송가 1,000곡 작곡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수십 권의 저서 중 주요 저서로 『곽선희 목사에게 배우는 설교』, 『한국교회 설교자 33인에게 배우는 설교』, 『하용조 목사 이야기』, 『권태진 목사의 사랑 이야기』,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를 묻고 답하다』, 『한국교회 예배와 음악 다시 보기』 등이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하용조 목사는 오늘날의 온누리교회의 모습을 감히 생각지도 못하였다. 우선 그는 몸이 약했고 마음도 몹시 지쳐서 영국으로 잠시 쉬러 간 상태였다. 오로지 영국에서 보고 들은 목회적 영감을 실현시키고 싶은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귀국하여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작한 목회가 오늘날의 온누리교회라는 위대한 결과를 낳았으니, 이는 사람의 노력이나 재주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온누리교회는 하나님의 작품이요 그분의 뜻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하용조 목사는 오늘날까지 아픈 육신을 돌보지 않고 초인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11p


사역자로 부름 받기 이전의 하용조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6년 8월 4일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일이었다. 그는 1965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 입문하였는데, 바로 그 이듬해에 경기도 입석에
서 가진 CCC의 여름 수련회에서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는 이 체험 후 자신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 뒤 예수님을 정신없이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목이 쉬도록 찬송하고 울면서 기도했고 밤을 새워 성경을 읽었다. 지금 외우고 있는 성경구절은 거의 그때 외운 말씀들이다. 또 ‘나의 팡세’라고 이름 붙인 큐티 노트를 만들어서 큐티를 규칙적으로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먹고 자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밤이건 낮이건 전도했다. 구치소에 가서 사형수를 만났고, 명동이나 남산이나 사직공원에 가서도 전도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에 가장 큰 변화와 축복을 안겨 준 CCC에서 7년간 사역한 후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의 영적인 터전을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전환하기 위하여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어렵게 거절하면서 다시 떠남의 행보를 계속한 것이다. 그는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신학도로서 학문과 영성을 닦는다. 그리고 신학교 재학 중 마포교회 교육전도사로 사역하였고, 1976년 5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목포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에게는 자연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중생의 사건과 함께, 평신도에서 성직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앙적 생활 안에서 그 위치에 대한 떠남과 정착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용조 목사는 1976년 목사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안수 받기 2년 전부터 배우, 코미디언, 가수 등과 함께 시작한 성경공부 그룹을 중심으로 연예인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제 목사 안수를 받은 자리에서 또 한 번의 떠남을 시도하여 한 교회의 목회자로 정착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하루 4시간씩 자고, 일곱 번 설교하고,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당시 연예인교회의 예배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여자 연예인들이 시커먼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눈물에 마스카라가 녹아내린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연예인들이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성령을 받고 순수해진 모습으로 서로 교제 나누는 것을 볼 때, 이번에는 내가 울면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군요. 주님의 교회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연예인교회가 한창 부흥하고 성전이 완공될 무렵 하나님은 하용조 목사에게 다시 떠날 것을 명령하셨다. 평소에 나빴던 간이 점점 악화되어 간경화로 판명된 것이다. 하 목사는 연예인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정처 없이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앞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으며 악화된 건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간이 나빠 두 시간만 차를 타도 몸이 녹초가 되어 쓰러질 만큼 피곤이 몰려왔으니, 그에게 목회는 고사하고 하루 앞의 목표도 무의미하던 때였다.
하 목사는 1980년 교회를 사임하고, 아픈 육신의 치료와 정신적인 휴식을 위하여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영국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선교단체와 교회와 학교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얻은 영감과 경험을 가지고 1985년 10월 6일 온누리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하용조 목사는 하나님의 종의 기본 자세는 ‘떠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명하실 때는 아브라함처럼 정처 없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이면 순종하고 조용히 떠나야 한다. […] 연예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시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목회자이다."
- 18-21p


하용조 목사의 목회에서 간과하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긍휼사역이다. 그는 ‘긍휼’(矜恤)이라는 조금 어려운 개념을 그대로 고집한다. 하용조 목사는 복음만을 강조하고 전도만을 강조하는 사람 같지만, 오히려 행동하는 복음, 실천하는 전도, 삶이 동반된 신앙을 함께 강조한다. 하용조 목사는 균형 잡힌 목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하용조 목사는 예수님의 심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배고픈 이웃을 바라보면서 목회하였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을 향하여 눈물이 많은 목회자다. 그의 이러한 긍휼적 성품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삶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의 가족은 목포 피난 시절에 어느 부잣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그 집 앞에 젖먹이 어린아이들이 버려지곤 했다. 전쟁 중에 먹고살 길이 막막한 부모들이 버리고 간 소위 전쟁고아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부모는 이 어린아이들을 차마 못 본 척하지 못해 집에 들여 키워 주었고, 자연히 영아들이 늘어나면서 영아원이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아마 이것이 내가 성장해서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애정을 갖게 된 동기일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버려진 영혼들을 돌보는 목회자의 길을 걷는 씨앗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으리요."

하용조 목사가 복음주의자들에게 흔하지 않은 이 실천적 긍휼사역으로 무장하게 된 것은, 후에 그의 스승인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하용조 목사는 최고의 멘토로 가나안농군학교의 창설자인 김용기 장로를 꼽는다. 김용기 장로는 하용조 목사에게 복음적인 신앙과 더불어 복음적인 삶의 바른 길을 보여 주고 이끌어 주신 분이다. 하용조 목사는 가나안농군학교 44기에 입소하여 김용기 장로를 만났고, 그에게서 큰 감명과 삶의 해법을 얻었다. 이는 하용조 목사가 복음과 실천이라는 양면의 균형을 잡고 목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바르게 믿는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로 김용기 장로처럼 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경의 말씀과 그 정신을 바탕으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김용기 장로님에게서 나는 삶의 큰 교훈을 얻었다. 단순히 도덕 윤리 차원의 성실함만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과 더불어 복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 그때는 몰랐다. 김용기 장로님의 삶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리고 그분처럼 사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되었다."
- 3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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