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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성경의 이해
· ISBN : 9788953119055
· 쪽수 : 344쪽
· 출판일 : 2013-03-15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Part 8
가슴 벅찬
성령 시대가 열리다
주후 30-32년
Chapter 8-1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
Chapter 8-2 급성장 상한가의 예루살렘 교회
헬라파 유대인과 스데반의 순교
Chapter 8-3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다
베드로와 빌립의 전도 사역
Part 9
핍박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의 회심과 제자의 길
주후 32년
Chapter 9-1 유대 엄친아 사도 바울
유대인 바울과 로마 시민권자 바울
Chapter 9-2 바울, 핍박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의 회심 사건과 전도자의 삶
Part 10
히브리파의 대표 예루살렘 교회와
헬라파의 대표 안디옥 교회
주후 32-47년
Chapter 10-1 안디옥 교회와 헤롯 아그립바 1세
그리스도인과 아그립바 왕의 핍박
Chapter 10-2 아름다운 동행,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초대교회의 중요한 두 축의 교류
Part 11
환상의 짝꿍 바나바와
바울의 전도: 1차 전도여행
주후 47-48년
Chapter 11-1 교회 네트워크를 세워나가다
갈라디아 지방에서의 사역
Chapter 11-2 바울의 선교 타깃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Chapter 11-3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할례 논쟁(주후 48~49년)
예루살렘 종교 회의가 열리다
Part 12
든든하고 흐뭇한
동역자들이 세워지다: 2차 전도여행
주후 49~52년
Chapter 12-1 환상의 짝꿍 바울과 바나바, 갈라서다
새로운 팀의 구성과 마게도냐 지방에서의 사역
Chapter 12-2 들불처럼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
아가야 지방에서의 사역
Part 13
광대한 아시아를 네트워크화하다:
3차 전도여행
주후 52~57년
Chapter 13-1 거침없이 전진하는 바울(주후 52~55년)
3년의 에베소 사역
Chapter 13-2 미스터리한 에베소에서 고린도까지 이르는 1년 6개월(주후 55~57년 봄)
고린도전·후서와 로마서를 쓰다
Chapter 13-3 죽음도 두렵지 않다, 예루살렘행(주후 57년 4-5월)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기
Part 14
기독교 대박해와
성전 파괴
주후 57년~70년
Chapter 14-1 신성 모독죄로 감옥에 갇히다(주후 57년 5월~62년)
유대인의 음모와 옥중 서신
Chapter 14-2 바울의 수감 그 이후와 네로의 기독교 대박해(주후 62~64년)
목회서신, 대박해, 사도의 죽음
Chapter 14-3 폭풍 전야의 유대 땅
유대인 대봉기의 정치적 배경
Chapter 14-4 안타깝고 슬픈 완전한 멸망(주후 66~73년)
유대인 대봉기와 성전 파괴
Chapter 14-5 에필로그: 성전 파괴 그 이후(주후 73~96년)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행 19:23).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그 도’라는 이름으로 탄생할 당시 이 종파는 확실히 유대교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난 새로운 종교로 인식된 것이 아니었다.
1세기 당시 유대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의 다양한 종파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했는데, 새롭게 시작하는 ‘그 도’도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나사렛파’로 불리는 유대교 내의 새로운 분파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유대교 종파에서 본다면 빠르게 성장하는 나사렛파가 ‘나사렛 이단’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사람 역시 ‘그 도’를 유대교 내의 독특한 이단 정도로 보았지 ‘기독교’로 불리는 새로운 종교의 출발로 여기지는 않았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행 24:5).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 도’ 또는 ‘나사렛파’로 불린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신약 편 3부에서는 꽤 자주 언급할 것이다. 기독교 교회라 부르기에는 분명 어폐가 있음에도 나는 이 공동체를 현대인의 시각에 맞추어 그저 ‘예루살렘 교회’라고 부르려 한다. p. 21
1세기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다룰 때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1세기 당시 로마 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9-11절에는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대인들의 3대 절기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출신지 목록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9-11).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면서(주전 586년) 최초로 발생한 유대인 디아스포라 현상은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되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70개의 신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면서 온갖 특혜를 베풀었다. 알렉산더의 정책은 그 뒤를 이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코스 왕조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이로 인해 주후 1세기경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가히 절정에 달하게 된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회는 이후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는 게 좋을 듯싶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회는 로마 제국에서도 그리스어권인 제국의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멀리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에도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정복(주전 63년) 이후 노예로 끌려와 살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기를 지나면서 평탄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또한 바벨론에 형성된 유대인 사회는 파르티아(성경에서는 바대, 행 2:9) 제국의 통치하에서 점점 번성해 갔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예루살렘과 강력한 종교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성지순례에서 잘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의 작은 도시인 예루살렘은 뜻밖에도 범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사도행전 2장 9-11절에 언급된 주후 30년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의 명단은 그 출신지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파르티아(바대) ,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까지 미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러한 원방(遠方)을 말한 후 유대를 말하고, 다시 북쪽으로 향해 갑바도기아와 폰투스(본도)를 명단에 올리고 있다. 그는 흑해 연안에서 서쪽으로 아시아 지역과 내륙의 브루기아와 밤빌리아를 말한 후 바다를 건너 이집트와 그 이웃 구레네로 향한다. 이후 로마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를 구분해서 언급하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누가의 디아스포라 명단은 크레타 섬(그레데)과 나바테안(아라비아)을 끝으로 매듭지어진다.
p. 26-28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출신
바울의 프로필은 그의 고향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좋을 것이다. 바울은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체포되어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앞에 끌려갔는데, 심문하는 천부장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행 21:39).
소아시아 남동부에 위치한 길리기아 지역은 주전 2세기 중엽부터 셀류코스 왕국의 지배권이 붕괴되면서 지중해 해적들의 본거지로 악명을 떨치던 곳이었다. 하지만 주전 67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대대적인 해적 소탕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이 지역은 타르수스(성경에서는 다소)를 수도로 한 길리기아 속주로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바울이 태어날 무렵 다소는 철학, 수사학을 비롯해 모든 학문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떨친 일종의 대학 도시였다.
하지만 이 도시는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처럼 다른 지역 출신의 유학생들까지 끌어들이는 매력은 없었다. 다소의 학도들은 주로 그 지역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은 고향에서 어느 정도 학문을 익힌 후에는 더 깊은 학문 수련을 위해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 등지로 유학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떠나고 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바울이 출생하기 전 다소가 낳은 가장 유명한 인물은 스토아 학파 출신인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였다. 그는 한때 옥타비아누스(성경에서는 가이사 아구스도, 눅 2:1)의 개인교사를 지낸 인물인데, 주전 15년에 고향 다소로 돌아온 후부터는 철학자에서 행정가로 변신해 부패한 시정을 개혁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그의 개혁 드라이브에서 바울의 생애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아테노도루스의 개혁 조치 중 하나로 통과된 시민법인데, 이 법률은 다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500드라크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바울이 천부장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라고 당당히 밝힌 것을 볼 때 그의 이름이 다소 시의 시민 명부에 등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가계에서 태어났고 또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재산 조건에도 부합했음을 의미한다.
다소는 고대부터 비옥한 평원을 낀 최고의 입지 조건으로 인해 번영을 구가해 왔다. 다소의 평원에서 자란 아마(flax)로 짠 다소산(産) 세마포는 아주 유명해 고대 저술가들의 글에도 종종 등장했다. 특히 추위와 습기를 막는 데 사용되는 염소털로 짠 ‘길리기움’ (cilicium)은 다소의 대표적인 지역 특산품이었다. 다소가 속한 지역인 ‘길리기아’ (Cilicia)란 이름도 그 지역 특산품인 길리기움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누가는 바울이 ‘천막 만드는 자’ (행 18:3)였다고 소개하는데, 아마도 바울은 그 지역 특산품인 ‘길리기움’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한 부모 밑에서 이 일을 배우며 유복하게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로마 제국 동부에 있는 다른 도시들처럼 로마 시민권의 특권을 소유하고 있던 다소의 시민들은 자연히 귀족적인 엘리트 계급을 형성해 나갔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소읍이 아닌’ 다소의 시민이라고 목에 힘을 주고 말한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p. 65-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