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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간증/영적성장
· ISBN : 9788953126718
· 쪽수 : 242쪽
· 출판일 : 2016-10-24
책 소개
목차
추천사 | 들어가는 말 |
1장 우리의 공부
| 1장 1절 공부의 의미 | 1장 2절 배움과 익힘 |
2장 우리의 스승
| 2장 1절 스승의 모방 | 2장 2절 고전의 탐독 |
3장 우리의 도반(道伴)
| 3장 1절 함께하는 독서 | 3장 2절 함께하는 대화 |
나가는 말 | 주(註)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들어가는 말에서]
교회가 빛과 소금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려면 우선 스스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때마침 내년이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마치 루터가 성경을 새롭게 읽어 복음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우리도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경에 대해 지식이 부족하지 않은 듯합니다. 문제는 성경과 복음을 머리로 아는 만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머리로는 알아도 정작 가슴으로는 체화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배움의 근본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만일 이런 생각이 옳다면, 우리에게는 종교개혁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르네상스가 필요합니다. 르네상스는 교양혁명입니다. 서구적인 교양의 모태는 고대 헬라 문명입니다. 르네상스의 의미가 바로 다시(re) 태어난다(naissance)는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원래 취지는 희랍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운동의 초점은 그리스 고전을 제대로 읽어 보자는 운동에 다름 아닙니다. 당연히 원어, 즉 헬라어 학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운동의 여파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시조인 루터는 신약성경을 새로 읽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라틴어로 쓰인 70인역 성경(Septuagint)을 읽었는데, 그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언어였던 헬라어 원전으로 직접 읽었습니다. 그 결과로 왜곡된 장로의 유전들을 깨닫고 혁파했습니다. 그는 투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그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기’였습니다. 이렇게 고전 읽기를 강조한 르네상스 덕택에 종교개혁이 탄생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한국교회에 교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영양이 결핍되면 병에 걸리듯이 지금 교회는 교양이 결핍되어 길을 잃고 있습니다. 교양이라는 개념이 세상의 초등학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느 한 면으로 보면, 그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 놓은 위대한 가르침들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합니다. 즉 교양인 에라스무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루터도 필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에라스무스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투사나 개혁자만큼이나 화평케 하는 자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현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고자 밖으로 뛰어들기보다, 자신을 바꾸고자 안으로 침잠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가리켜 교회에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공부하는 교회,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나가는 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공부에 달렸습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지요. 하지만 (르네상스와도 같은) 정신변혁이 먼저 필요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 제자도를 통해 다시 정리하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제자도를 말하지만, 그게 왜 중요하고 나아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제자됨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며,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따르는 것이며,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증명됩니다. 말은 주(注)이며, 삶은 본문입
니다. 각주는 본문 아래에서, 그리고 미주는 본문 뒤에서 겸손하게 본문의 내용을 부연하고, 떠받칩니다. 주는 원래 본문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이 바로 서야 말이 힘을 갖게 되는 법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삶에 주목하게 될 때에만, 오직 그 순간에만 우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공부라는 키워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제자됨입니다.
공부는 끝없는 수련이고, 훈련이며, 연단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결국 예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이지요. 삶과 훈련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삶이 곧 훈련입니다. 스스로 기도함으로써 기도를 배운다고 했듯이 예수를 따름으로 예수 따름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를 따라 살고자 고투하는 과정을 통해 예수를 따라 사는 삶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훈련이 넘쳐흘러 일상을 엄습하는 경지에 도달해야 제대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일상과 훈련의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합니다. 전통적인 무도 선생의 무술 지도는 의외의 방식으로 일상에 개입합니다. 정형화 된 무술 교본을 통해 정식 수련 시간에 배우는 것을 넘어서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것이지요.
(중략) 제가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해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배우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은총 안에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와 은총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고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구체적인 해법입니다.
저는 그것을 공부에서 찾았습니다. 스승과 도반은 공부의 두 가지 조건입니다. 신앙적으로 번안하면, 예수님과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스승이시고, 교회 공동체는 우리의 도반 즉 우리와 함께 주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풀어 말하자면, 독서와 나눔입니다. 먼저 성경과 기독교 고전을 통해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같이 읽고 함께 나누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홀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우정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독서와 대화가 존재 변혁의 동력이 됩니다.
(중략)우리가 함께 읽고 나누는 책들이 우리 내면의 존재를 만들어 갑니다. 성경과 고전을 읽을 때에 우리는 생명의 샘과 지혜의 근원에 연결됩니다. 삶이 확장되고,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살아가려면, 즉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먼저 성경과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내일은 책을 집어드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공부는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른 공부는 바른 행위 이전에 바른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배움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좋은 스승’입니다.
배움과 익힘이 공부의 근본입니다.
몸으로 반복하여 익히는 것은 앎과 삶의 간격을 줄이는 것입니다.
성장을 위한 독서는 묵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익숙해짐이야말로 깊은 독서와 깊은 묵상의 전제이며, 공부 그 자체일 것입니다.
지도력의 전제는 곧 독서입니다. 그것도 넓고 깊은 독서입니다.
성숙의 여정에 나서려면 함께할 참 친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함께하는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 공부가 세상을 지키고, 미래를 열어 갑니다.
우리의 열린 대화 가운데 지혜의 영이 임하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대화에 필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