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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트렁크

보라의 트렁크

한상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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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트렁크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보라의 트렁크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4428194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2-08-09

책 소개

기발한 상상력의 아이콘 한상운의 첫 소설집. 2006년부터 2012년 여름까지 작가가 집필한 단편 여섯 편을 담고 있다. 각각의 개성이 살아 있는 단편들은 주제나 소재의 측면에서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한상운 작가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목차

보라의 트렁크
그해 여름
당신의 데이트 코치
무림인
푸른 수염
거름 구덩이

작가의 말

저자소개

한상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소설가이자 각본가. 『양각양』 『비정강호』 『특공무림』 『무림사계』 등의 무협소설과 경찰소설 『무심한 듯 시크하게』, 미스터리 소년추격전 시리즈 『게임의 왕』 『소년들의 밤』, 소설집 『보라의 트렁크』, 장편소설 『인플루엔자』 『비주류 연애 블루스』 『친애하는 나의 적』 등을 출간했다. 영화 〈내 연애의 기억〉, 드라마 〈뉴토피아〉 원작자이자 〈백야행〉 〈청년경찰〉을 각색했고 드라마 〈텍사스안타〉 〈완벽한 스파이〉 〈굿와이프〉 〈왓쳐〉 〈해피니스〉 등의 각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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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니가 보라 죽였지?”
형님은 두꺼비가 쓰던 삽을 들고 네 머리 위에 서서 묻는다. 기운만 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 입에서 나온 말은 속삭임에 가깝다.
“내가 안 죽였어.”
“보라는 너한테 돈을 챙겨 달아나자고 했을 거야. 너는 근본 없는 새끼니까 옳다구나 했겠지. 그런데 보라는 널 공짜 짐꾼 정도로 생각한 거지. 날 피해서 이 동네만 빠져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넌 그걸 알고 화가 나서 보라를 죽인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다 여기 묻을 생각을 한 거지.”
“아니야.”
형님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그런데 네가 언제 산에 올라와봤어야 말이지. 소싯적에 본드 불러 올라왔던 게 단데. 어딜 파야 되는지 알 리가 있나. 그렇다고 땅을 깊이 팔 정도로 끈기가 있는 놈도 아니고. 적당히 시체를 덮을 만큼만 파고 그만둔 거지.”
“아니라니까!”
너는 있는 힘껏 소리친다. 형님은 흙을 퍼 네 얼굴에 뿌린다. 좁은 구덩이는 피할 곳조차 없다. 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구석에 웅크린다.


스토커 놈이 두시에서 세시 사이에 온다고 했지?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다 먹은 맥주를 가방에 넣고?경찰이 타액 검사라도 하면 귀찮아지기 때문이다?가방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황학동 노점상에서 구입한 독일제 식칼이다. 데이트 코치가 된 이후로 여러 종류의 칼을 써봤지만 독일제가 제일 낫다. 일제는 날카롭지만 얇아서 갈비뼈에 걸려 쉽게 부러지고 미제는 단단하지만 무겁고 투박하다. 그에 비해 독일제는 그립감도 좋고 날카로우며 단단하다.
현관에 비닐을 깔고 벽에는 신문지를 붙였다. 그리고 뒤처리를 할 장비를 꺼내 놨다. 마지막으로 침실에 가서 여자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으로 내려와 핸드백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열린 핸드백 틈으로 핸드폰이 보였다. 이래서는 곤란하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좀 더 세게 팔다리를 묶었다. 그녀는 간질 환자처럼 발버둥 쳤지만 입이 막혀 있어 말을 하진 못했다. 그녀가 안쓰러워져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이제 스토커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책임지고 해치울 테니까요.”
그녀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물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사부는 어젯밤에 죽었다.
한밤중에 오줌을 싸러 나왔다가 그 사실을 알았다. 식당이 온통 피바다였다. 나무 탁자는 반으로 잘려 있었고 술과 요리는 피로 범벅이 되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처음에는 적의 기습이라고 생각했다. 사부의 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적은 있는 법이니까.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그냥 방으로 돌아갈까? 나는 축축해진 바지를 문지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문을 잠그고 침대 아래 숨어서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거다. 아침이 되면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곧 마음을 돌렸다. 세상에는 아무리 두렵고 힘들어도 피해선 안 되는 일들이 있다. 도망치는 것도 버릇이다. 무림인의 제자가 되었으니 달라져야지……라기보다는 설마 사부가 당했으랴 싶은 마음이 컸다. 점수를 따려면 이런 때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부엌칼을 찾아 쥐고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갔다.
사부는 거기 있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엉금엉금 밖으로 기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사부 옆에 두 사형이 있었다. 그들은 사부의 등에 칼을 찔러 넣느라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부는 한 번 찔릴 때마다 헉, 헉,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멎고 사형들의 칼질이 그칠 때까지, 나는 얼이 빠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때 칼을 거두던 둘째 사형이 내 쪽을 보았다. 이제 죽었구나, 머릿속이 아찔해질 때 그는 내게 피 묻은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막내야, 이리 와서 시체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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