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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미술 > 화집
· ISBN : 9788955751536
· 쪽수 : 424쪽
저자소개
책속에서
가을볕에 잘 여문 사과들을 산다. 그런데 그 사과들 중 한,두개는 먹지 못하고 꼭 시들게 하고 만다. 할머니의 주름처럼 될 때까지 두었다 결국 먹지 못하는 사과로 만들기 때문이다. 붉은빛이 너무 예뻐 감히 먹을 수가 없다. 그 빛에 취해 만지는 것조차 흠집이 생길새라 두려워 보고 또 보고만 있는 것이다. 평생을 고결한 선비로 살다 가신 퇴계가 즐겨 읊은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이란 싯귀가 있다. 홍난파 선생의 봉선화를 흥얼거리고 있노라면, 어느덧 옆에서 함께 따라 부르고 있는 이. 그러다 소월의 초혼을 낭독하는 이. 빵집에서 산 단팥빵을 한입 깨물며 “아 맛있다”며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이. 오십을 넘겨 만난 칠십이 넘은 그 이. 지난 세월 속에 아픔이 왜 없었을까 만은, 또한 흉은 왜 없었을까 만은. 요즘 그이가 내게 보여주는 붉은 빛은 너무나 예쁘다. 그이가 풍겨내는 향은 퇴계의 향이다. 세속에 찌든 내가 그 빛과 향을 만지면 흠집이 생길까 겁이나, 보고 또 보고만 있다. 그이의 빛과 향에 취해 때론 어지럽기 조차하다.
그림을 그리는 그이의 집에 손때 묻은 시집들과 많은 문학서, 그리고 어색하지 않은 고가구가 그득하다. 그래서 그이의 그림에 향이 풍겨 났었구나. 그이의 집 거실은 온통 묵향에 젖어있다. 그이의 집 작은방과 그이의 파주 작업실은 수백, 수천, 수만의 꽃빛들로 물들어 있다. 그이가 요즘 살고 있는 모습이다. 뜬금없이 전화가 온다. “뭐해?” 참으로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우물쭈물하다 보면 “수고해요” 전화는 끊어지고 그이가 전화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혼돈이 온다. 그래서 확인 차 전화를 걸면 받지 않는다. 어떤 날 그이가 친 매화와 국화를 보고 있노라면 옆에서 “어허 참 담백하네” 한다. 내가 돌아보면 영낙없이 딴전이다. 그런 이가 요즘 화폭에다 꽃을 키우고 있다. 욕심도 많게 수백, 수천, 수만의 꽃을 키우고 있다. “영감은 꽃을 왜 키우는 거요” 하였더니 “그냥 먹이 싫증나서”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이가 먹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이가 이 땅에서 보여준 오묘한 먹의 변화들을. 그이의 먹은 울창한 숲속의 나무가 되었다가, 외로운 섬들이 떠있는 바다가 되었다가, 산이 되고 달이 되어 온 산천을 뛰어다니다, 요술같이 변해 점이되고 기호가 되어 새로운 조형의 우주를 만든다. 세상의 참으로 많은 입들이 무어라하든 내게 그이의 꽃은 그이가 칠십이 넘어 가꾸는 새로운 우주이지 싶다. 세상의 참으로 많은 눈들이 무엇을 보든 난 그이가 키우는 파란, 빨강, 노랑 등 형형색색의 수많은 꽃들 바탕에 배여, 출렁거리고 있는 먹의 바다를 보고 있다. 먹의 바다를 지나온 사람만이 키울 수 있는 꽃들이, 그의 화폭에, 그이만의 독특한 꽃들로 자라나 있는 것이다. 그이의 먹이 키우고 있는 꽃들을 보고 있다. 그 꽃들의 빛과 향이 너무 예쁘고 황홀해 그냥 보고, 맡고 있을 뿐이다. 그이의 꽃들을 보고 있자면 “아 맛있다” 며 그이가 베여 물던 단팥빵의 맛처럼 “아 맛있다”.
-서문 남천의 꽃, 그 빛과 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