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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57515500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0-05-15
책 소개
목차
엉겅퀴 쓰나가 걸어간 길
죄 많은 여자(1952년 제27회 나오키상 수상작)
맨발의 청춘
잘 가요
여자만의 업보
자매의 사랑
덫
기묘한 충동
부침(浮沈)
흘러가는 반딧불이
리뷰
책속에서
‘왜 괴롭힘을 당해야 할까?’
쓰나의 이 당연한 의문은 세상이 본래 이렇게 무서운 곳이고 ‘나는 뱀의 자식이니까’라는 해답으로 이어졌다.
이런 해석은 쓰나에게 ‘뱀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그 말을 긍정하게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막연하게나마 자신을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쓰나 일가는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쓰나는 자신의 옷차림과 마을 아이들의 옷차림 차이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느낀 쓰나는 길들어진 짐승이 그렇듯 반항심을 잃었다. 누가 어떻게 괴롭히든 쓰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_〈엉겅퀴 쓰나가 걸어간 길〉 中
똑같은 태양빛을 받아도 그들의 세계는 다르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칼이 사과 껍질을 깎거나 연필심을 깎을 때 쓰는 도구지만, 그들에게는 사람을 협박하거나 죽일 때 쓰는 도구이자 비뚤어진 용기를 샘솟게 해주는 유용한 물건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거대하고 인생은 너무도 짧아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세계를 느끼고 그곳에 모여 일생을 보내는 것을 쉽사리 허용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슨 특이하고 이상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평생 집안의 잡다한 일에 내쫓기는 가정주부나 평생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악착같이 일해야 하는 남자들보다 더 인간적인 여러 감정을 자유롭게 키워나고 있기 때문에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들이 낫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집안일에 쫓기는 주부와 일개미 같은 남자들에게는 사회와 신이 평화와 행복을 보장해주고, 그들에게는 위험과 죽음이란 형태로 벌과 회한을 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들에게는 그리 큰 고통이 아니다. 고통을 느끼고 깊은 회한에 시달리기에는 거대한 사회 속에 그들을 달래주는 것들이 너무도 많고, 목숨이 너무도 짧으니까.
물론, 그들에게도 예외는 있다.
지로가 그렇다.
_〈맨발의 청춘〉 中
4미터 남짓 남았을 때 쓰타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지, 남자가 쓰타의 발소리를 알아챘는지, 흠칫 놀란 남자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쓰타는 보폭을 늦추며 침착하게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창문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까닭에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쓰타의 마음과 남자의 당황한 모습이 절박하고 심각하게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뒤를 돌아본 남자는 당황하며 여자를 먼저 내려 보내려고 했다. 쓰타와 나눌 이야기를 여자한테는 들려주지 않을 셈인 듯 보였다.
여자를 먼저 보내놓고 멈춰 있는 남자에게 다가간 쓰타는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한두 마디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쓰타가 종종걸음으로 여자를 쫓아갔다. 그러면서 손을 뻗었다. 여자를 다 따라잡자마자 쓰타는 뻗은 손을 여자의 옷깃에 갖다 댔다. 제대로 접히지 않았는지, 쓰타는 여자의 옷깃을 매만져주었다. 여자는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뒤에서 걸어온 남자와 팔짱을 끼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여자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멈춰 서서 배웅하는 쓰타는 애처로울 정도로 친절한 온천 여관의 여급이 되어 있었다. 여자가 손을 흔들 때마다 두 사람을 축복하듯 허리를 굽혀 따뜻한 인사를 보냈다. 비탈길 모퉁이에 다다른 여자는 크게 손을 흔들고는 모퉁이를 돌아 산자락 아래로 사라졌다.
남자와 여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 후에도 쓰타는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다 팽팽한 긴장감이 툭 끊어졌는지, 힘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앉았다.
조용한 산자락의 진한 노을이 쓰타의 하얀 목덜미를 감쌌다.
_〈부침(浮沈)〉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