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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10

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10

전우성 (지은이)
  |  
한솜미디어(띠앗)
2024-03-05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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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10

책 정보

· 제목 : 우리 고대 국가 위치를 찾다 10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한국고대사 일반
· ISBN : 9788959595846
· 쪽수 : 456쪽

책 소개

주류 강단 사학계의 '젊은 역사학자 모임'의 한국 & 중국 정사 기록에 의하여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주류 강단사학의 식민사학을 파헤친다.

목차

■백제의 천도지이자 남쪽 경계였던 웅진(웅천)에 대하여_16
■백제 성왕 죽음 장소인 관산성에 대하여_46
■백제 도읍에 대한 고고학적 측면에 대하여_79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에 대하여_87
■바다를 통한 당나라의 백제 공격에 대하여_98
■당나라 소정방 출발지 성산에 대하여_117
■제1차 도착지인 덕물도에 대하여_121
■제2차 도착지인 웅진구와 기벌포, 백강에 대하여_126
■백제 항복 주체에 대하여_140
■임나가라에 대하여_154
■임나일본부의 왜의 외교 사절설 논리의 근거 비판_170
■대가야 설정의 허구성에 대하여_246
[대가야의 존속여부]_246
[대가야의 멸망 사실 허구]_248
[임나에 대한 여러 가지 위치설에 대하여]_261
[임나일본부의 왜의 외교 사절단에 대한 비판]_269
[이영식 교수의 가야국 설정 비판]_269

■왜의 외교 사절설 실체 비판_329
[안라의 한반도 가야 비정 근거]_333
[외교 사절 역할에 대하여]_343

■『일본서기』 신뢰성에 대하여_352
■고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상황에 대하여_358
[율령국가의 통치체제]_375
■왜가 침입한 대방계에 대하여_389
■407년 광개토대왕의 기병 5만에 의한 공격에 대하여_393
■가야와 포상팔국에 대하여_403
■가라의 기록에 대한 고찰_415

[맺는 말]_425

·인용 사료 목록_436 / 참고 자료 목록_451
·지도 목록_454 / 도표 목록_456

저자소개

전우성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 대전 출생으로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감사행정학을 전공하였다. 관세청에서 근무하였으며 퇴직 후 현재는 관세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 역사 특히 고대사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한편 고대사 왜곡 및 국민의 역사 인식 제고에 한몫을 한다는 일념으로 - 1998.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을지서적) - 2015. 『다시 쓴 한국 고대사』 (매경신문) 출간 이후에도 왜곡이 바로 잡혀지지 않은 채 국민들의 역사 인식이 오히려 악화됨을 우려하여 고대사에 대한 중국정사와 우리 고대사서를 교차검증 연구한 결과 우리 고대사 전반이 한반도만으로 비정된 채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각고의 중국 및 우리나라 정사연구에 의하여 밝혀진 고대사의 진실과 이에 따른 올바른 위치 비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 저서를 저자의 마지막 결실로 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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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백제의 천도지이자 남쪽 경계였던 웅진(웅천)에 대하여]

백제는 일제 식민사학에 의한 주류 강단 사학계에 의하여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 공격에 따라 백제가 천도하였다고 사서에 기록된 웅진을 지금의 한반도 공주로 비정하고 있다. 백제가 한반도에서 건국되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백제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본토 산동성에서 건국되었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중국사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중국 본토에 있던 백제가 남한(南韓) 지방으로 철수하는 것은 동성왕 내지는 무령왕 시기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본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백제 말기까지 중국 본토에서의 활동 사항이 확인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중국사서 기록상의 남한(南韓)은 한반도의 남쪽이 아니라 원래 마한 등 삼한의 한(韓)으로써 백제가 탄생한 마한이 있었던 중국 본토 산동성으로 기록한 것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소위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된 위치인 삼한의 위치이다. 중국사서 기록상 삼한의 남쪽에는 왜가 육지로 접해 있고, 육지로 가까이 접해 있어야만 당시에 가능한 문신 교류 등에 의하거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상 수시로 남쪽에서 침범한 세력과 북쪽에서 침범한 말갈 세력 그리고 백제의 동쪽이자 신라의 서쪽에 낙랑이 있어 괴롭힌 곳은 한반도일 수가 없다. 따라서 이에 의하면 삼한의 위치와 이 삼한에서 건국된 소위 삼국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일 수밖에 없다. 이 위치에서 백제가 이곳 삼한의 한에서 그 남쪽인 남한(南韓)으로 옮긴 시기는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에서 남쪽인 웅진(웅천)으로 옮겼다. 이러한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상의 시기상 차이는 뒤의 시기로 기록한 중국사서의 오류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같이 옮기는 사실이 있더라도 원래 백제가 있었던 중국 본토에서의 계속된 활동이라는 사실은 사서의 기록에 의하여 확실히 입증된다. 이러한 남한(南韓) 지방으로 옮긴 사실에서의 백제가 한성으로부터 옮긴 곳을 『삼국사기』는 「백제본기」상에 웅진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료544】『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본기 제4 문주왕(文周王) 一年冬十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다 (475년 10월(음))

원년 겨울 10월에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앞에서 인용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사기』의 다른 편인 「지리지」 ‘백제편’상에는 웅진과는 다른 웅천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또한 마찬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웅진이 아니라 웅천이라는 기록이다.

【사료314】『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四 백제(百濟)

《고전기(古典記)》를 살피건데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년에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註 247)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取髙句麗南平壤, 都漢城.)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31세 의자왕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당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유신(金庾信)과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

註 247
지금의 서울특별시의 강북 중심 지역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75쪽).

【사료315】『삼국유사(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서기전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 지금의 광주(廣州)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州)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원휘(元徽) 3년 을묘(475년)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물론 웅진과 웅천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웅천은 백제 초기 도읍지와 관련된 기록에 있다.

【사료119】『삼국사기(三國史記)』 卷 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시조 온조왕(溫祚王) 13년 8월

마한에 도읍을 옮긴다고 알리고 강역을 정하다 (기원전 6년 08월)

〔13년(B.C. 6)〕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遷都]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註

002)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註 003)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註 004)에 이르렀다.

註 002
패하(浿河) : 패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대동강으로 보는 견해,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 임진강으로 보는 견해(酒井改藏, 1970; 全榮來, 137쪽) 등이 있으나, 현재의 예성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패강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나, 패수와는 달리 볼 여지도 있다.
〈참고문헌〉
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朝鮮學會
全榮來, 1985, 「百濟南方境域의 變遷」,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正音文化社

註 003
웅천(熊川) : 웅천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안성군 안성천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247~248쪽)와 공주의 금강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1976)가 있다. 모두 지명의 유사성을 근거로 위치 비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24년(6) 7월조를 보면 백제의 웅천책 설치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서 꾸짖고 있어, 웅천이 백제가 마한과의 관계에서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던 중요한 곳임을 암시한다. 당시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의 중심지 자체가 천안 아산 일대로 추정되므로 웅천은 안성천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웅천이라는 명칭은 2006년 중국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禰寔進 墓誌銘)」에 묘주의 출신을 ‘熊川人’이라 표기한 것과 본서 권37 지리 4의 백제의 웅천주에 속하는 군현명이 기술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一志社

註 004
주양(走壤) : 현재의 강원도 춘천 지역으로 비정된다. 춘천의 옛 명칭은

수약주 또는 주양성이었는데, 이는 본서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3년(673) 9월조의 “9월에 국원성 … 수약주의 주양성(일명 질암성) …을 쌓았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 본서 권37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에는 주양성(走壤城)이 보인다.

이곳이 백제의 첫 도읍지가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하여 한반도가 아닌 것이 입증되므로 여기서 천도한 웅천도 당연히 한반도가 될 수 없다. 이미 앞에서 입증하여 설명하였듯이,

- 북쪽 경계인 패하는
백제 근초고왕 시기에 369년 치양(주양) 전투가 있은 다음 2년 후에 다시 고구려가 공격해 옴에 따라 371년에 전투가 벌어진 패하는 이후 광개토대왕 시기인 394년, 395년에 전투가 벌어진 패수이다. 이후 백제 온조왕 시기의 북쪽 영역상의 패하이자, 369년 동쪽 경계인 치양(주양)에서의 전투가 있은 다음에 다시 고구려가 패수로 공격해 오는가 하면 395년 패수 전투 시에는 한수 및 한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하면 이후인 495년 고구려의 치양 공격 시 신라가 구원을 해주었다. 이는 패하와 패수가 같은 것으로 그 위치는 백제의 북쪽 경계로 이곳의 패하 및 패수가 동쪽 경계인 치양(주양)으로 이어지고 이곳 인근에 신라가 존재함을 입증한다. 이 패하이자 패수는 백제의 도읍인 한성 지방의 북쪽인 한수의 북쪽을 흐르면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서 고구려 졸본성 남쪽을 흘러 【사료30】『신당서(新唐書)』 「가탐도리기」 사서기록의 “(안동도호부에서) 동남쪽으로 평양성(平壤城)까지 800리이고, 패강구(貝江口)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의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長口鎮)에 도달한다.”이 패강이 된다. 이러한 여건을 충족하는 강은 백제의 도읍인 한성의 북쪽을 흐르는 한수인 산동성 황하로써 이 강의 북쪽을 흐르는 도해하로 이 강은 동쪽으로 흘러 백제의 동쪽 경계인 주양(치양)의 북쪽을 흘러서 고구려 졸본성 남쪽을 거쳐 다시 동으로 흘러서 신라의 북쪽을 흐름으로써 입증이 된다.
이러한 패수, 패하, 패강에 대하여 주류 강단 사학계는 그들의 통상적인 패수에 대한 비정인 청천강 내지는 대동강을 접어두고 백제와 관련된 것은 예성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물론 같이 나타나는 치양에 대하여도 황해도 배천 내지는 원주 치악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한편 신라와 관련된 패강에 대하여는 대동강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자체적으로도 모순인 동시에 위에서 살펴본 대로 백제의 북쪽 경계가 동쪽의 경계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고구려와 신라와 연계되는 이 강이 예성강 내지는 대동강일 수는 없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백제가 여기까지 영역으로 한 사실이 없다. 물론 근초고왕이 371년 패하 전투 이후 평양성 공격으로 고국원왕을 전사케 한 이 패하와 평양성을 각각 위의 비정대로 예성강 내지는 비정하지 못하는가 하면 평양성 역시 황해도 내지는 평양시 등 제대로 비정하지 못하고 있다. 맞지 않은 한반도에 비정하니 제대로 모든 것을 충족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신라가 구원해 줄 정도이면 이곳은 황해도 지방이 될 수 없다. 물론 이를 감안하여 제대로 비정을 못 하고 있는 이유이다. 또한 같은 강이 분명한 신라의 패강에 대하여는 대동강으로 비정한다. 이는 이후의 소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이렇게 비정함으로써 소위 통일신라시대의 북쪽 경계가 이 대동강으로 비정되었다. 이 비정은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조작하여 책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근초고왕이 공격한 평양성에 대하여 주류 강단 사학계의 논리대로라면 제대로 비정을 못 하는가 하면 이후 377년에 이루어진 근구수왕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에 대하여도 비정을 안 하고 있다. 그러고는 이후 551년에 이루어진 백제와 신라의 연합 공격에 의한 고구려 10군(성)인 한성 지역과 죽령 지역 재탈환 시에 이루어진 평양성 공격에 대하여는 이병도의 비정에 따라 남평양으로 해석하여 서울의 북한산성에 비정하고 있다.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듯 백제의 도읍인 한성의 북쪽에 흐르는 한수의 북쪽을 흐르면서 동쪽 경계인 치양(주양)의 북쪽을 흘러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곳이면서 동쪽으로 신라와 가까운 패강이 되는 하천이 있고 지역이 있는 곳은 도저히 주류 강단 사학계가 제대로 비정하지 못하듯이 한반도일 수가 없다. 이곳은 산동성 백제의 북쪽 한수인 황하의 북쪽을 동쪽으로 흐르는 도해하로써 고구려 졸본성 남쪽을 흐르는 중국사서 기록상의 평양성(산동성 졸본성) 남쪽을 흐른다는 패수가 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신라의 북쪽을 흘러 『신당서』「가탐도리기」상의 패강이 된다. 따라서 백제의 패하이자 백제와 고구려의 패수이자 신라의 패강이 동시에 되는 강이다.




백제의 북쪽 경계인 패하는 고구려 산동성 평양성인 졸본성
남단을 흐르는 패수이자, 신라의 패강이다. 이 패하는 백제의
동쪽 경계인 주양(치양)에 닿는다. 이러한 것을 충족하는 곳은 패수,
한수, 대수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흐르는 산동성이다.


- 서쪽 경계인 바다는
백제에 해당하는 한(韓) 즉 삼한(三韓)의 서쪽에 있는 마한 즉 나중의 백제가 세워지는 곳의 서쪽 바다로 기록된 같은 곳의 바다는,

【사료64】『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韓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

【사료109】『후한서(後漢書)』 東夷列傳 韓

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셋째는 弁辰이다.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伯濟는 그중의 한 나라이다.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이다.
[馬韓의] 남쪽 경계는 倭에 가까우므로 文身한 사람도 있다.

지금 개념의 바다[海]가 아니라, 중국사서가 고대 하북성 및 산동성 기록에 있어서 하북성 호타하, 산동성 황하, 수로, 큰 호수 등을 바다로 기록하였다. 이에 의하면 이 마한 및 백제의 서쪽에 바다로 기록된 이것은 산동성 태안시 비성시에 있었던 백제의 서쪽 경계로 삼은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의 동평호인 호수이다. 그리고 위 두 사서 모두 동서 양쪽은 바다로 접하고 있다는 기록상의 동쪽의 바다는 삼한의 동쪽에 있었던 진한에서 건국된 신라의 동쪽이므로 이는 실제로 지금 개념의 바다로 산동반도 인근 바다이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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