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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61043335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3-04-30
책 소개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인공위성 10
내비게이션 12
타오르는 침묵 14
박물관 입구에서 16
인터체인지 18
멀미 20
마네킹의 안부 22
안전화 24
실버라이닝 26
단일 식물의 개화 조건 28
앉은뱅이 장어집 30
코스모스 32
제2부
종이비행기 36
내가 사는 발라드 38
빈 병 40
아바타 41
압력밥솥 42
이명 44
타짜 46
역류성 불면증 48
고추를 따다가 50
구름 유치원 52
열쇠 54
후천적 브런치 56
지폐의 표정 58
제3부
어묵 62
건조주의보 65
싱크홀 68
배설의 용기 70
거세 72
불의 고지서 74
사발면 난독증 76
머리핀 78
세 개의 신호등 80
냉동인간 82
막대사탕 84
편지 86
제4부
지붕을 이고 사는 목수 88
수채화 그리기 89
개조심 90
라디오 92
마사지 94
닻 96
탁구 치는 자전거 98
꽃게 100
리모델링 102
담배를 키우는 사내 104
야광팬티 106
구멍 난 옆구리 108
사라지는 질량들 110
서리 112
▨ 최병철의 시세계 | 김건영 114
저자소개
책속에서
인공위성
아직은 지구에 더 머물겠다는 딸아이를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렸지요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던 딸아이는 두고 가는 것이 있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지요 못내 빈손이 아쉬워 뭐라도 쥐여주려 했지만, 미리 장착된 강력한 로켓은 아이의 눈빛을 빠르게 거두어 갔지요
솟아오를 때 들려오던 바람 소리와 마찰열로 한동안 교신에 실패했지요 질량을 느끼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러 궤도를 수정하고 자리를 잡은 아이는 지구를 축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지요 가족들의 공전 주기와 아이의 자전 주기가 같은 적도쯤에서 정지위성이 되어 그리움을 전송하기 시작했지요
상공에서 보는 지표면은 한동안 달달하고 푸르고 아름답게 보이겠지만 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구름을 만들어 지구를 향해 비를 송신하곤 했지요 그 빗속에는 천둥과 번개가 섞여 있었고 그 아득함 너머로 수신된 뉴스는 원심력을 주체하지 못해 궤도를 이탈한 위성들 이야기로 성층권을 채우고 있었지요 하늘이 열릴 때마다 우리는 아이가 우주의 미아가 될까 봐 늘 안테나를 높이 세워두고 있었지요
긴 꼬리를 가진 혜성이고 되고 싶어 했던 아이는 홀로 콩나물국밥으로 저녁을 때우면서 우주인이 되어갔지요 지구의 중력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무중력 상태의 그리움을 자해하는 날이 늘어만 갔지요 우주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중력을 다스리는 것이라 말하던 아이가, 지구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꽃게
장손은 섬이었다
할아버지가 펼쳐놓은 바다에 담겨 있던 당신
잠시 뭍에서 맡은 쇠 냄새만
해안선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맴돌고 있었다
바다의 모퉁이에 헐렁하게 용접되어 있었지만
기운 기둥을 일으켜 촘촘하게 그물을 걸고
부력으로 집안을 밀어 올렸다
뱃머리가 바다를 가를 때마다
철공소에서 대문을 만들었던 시간들이 솟구쳐 올랐고
가풍의 출입을 철대문으로 막고자 했는지 모르겠다
배를 저어갈 때 방향을 잡아 주던 어머니가
물 밑으로 가라앉고
철의 껍질에서 탈피했다
조금씩 자유로워질 때쯤
딱딱해진 가슴 위로 그물을 펼치고
휑한 구멍을 꿰매고 있었다
물때를 기다렸던 밤
팽팽한 수면을 찢고
그렁그렁 달빛이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바다가 심심해지면 안부가 궁금해지는 법
기다림만 키우다 통발에 자신을 가두던 당신
절단기로 섬을 해체하고
배를 수평선 바깥으로 몰아 마지막 항해를 시작하지만
집게발이 파도를 물고 놓지 않는다
실버라이닝
알을 낳지 않는 뻐꾸기는 폭력을 편애한다고 가정하자
아빠 바쁜데 얼른 가
구름의 문장을 너무 빨리 해독한 탓에 꽃을 건너뛰고 열매가 된 아이가 무딘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찌른다 하마터면, 꽉 깨물지 못한 어금니가 오타를 찔끔 흘릴 뻔했다
구름이 떼로 몰려다닌다는 졸업식도 옛말이더라 닫아 둔 커튼 앞에서 아이들은 가그린 한 이빨을 풀어내며 오리발을 챙기고 있더라 오히려 지느러미가 없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다니까
아비 염장에 뿌리내린 바람은 구두를 어디에 벗어두는지가 점점 궁금해질 때쯤 나뭇잎에 낙서하고 꽃의 목구멍에 작대기를 밀어 넣어 울음을 마구 후려친다 맺히기도 전에 떨어진 열매도 열매더라 구름이 엉덩이 주사처럼 왔다 가더니 요즘은 머물다 가는 시간이 자꾸 길어진다
꽃다발을 벌리고 교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구름의 솔기 끝에 매달려 있던 여우비는 그치고 꽃집 안으로 프리지어 한 다발 쑥 들어온다
유레카, 부러진 날개로 만든 꽃다발이 있어요
구름의 분비물을 뒤집어 써보니 알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