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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1432405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24-09-15
책 소개
목차
1부 Spring Diary
침묵의 땅에서 _ 14
국경으로 _ 16
피로 쓴 일지 _ 20
새날이 올 때까지 _ 92
2부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미래의 죽음 _ 98
팬데믹 _ 99
혁명 속으로 _ 107
낙화, 그리고 움트는 저항의 씨앗 _ 117
선전포고 _ 130
전사가 된 청년 _ 138
친자관계 절연공시 _ 151
딜레마 _ 161
불타오르는 국경 전선 _ 169
참가자와 관망자 _ 179
포가튼 미얀마 _ 183
메멘토 _ 194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_ 198
명에도 이름도 남김없이 _ 208
에필로그 _ 215
3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잔혹한 폭력에 희생당한 미얀마 민중·1
- 찌민다잉 참사와 뒷 이야기 _ 220
잔혹한 폭력에 희생당한 미얀마 민중·2
- 뗏수 흘라잉에게 자유를 _ 228
잔혹한 폭력에 희생당한 미얀마 민중·3
- 흘라잉따야의 두 민주열사, 흘라묘아웅과 아웅뚜라저 _ 235
잔혹한 폭력에 희생당한 미얀마 민중·4
- 2022년 10월 23일 오후 8시 40분, 잊힌 참사, 까친주 어난바 학살 _ 243
잔혹한 폭력에 희생당한 미얀마 민중·5
- 폐허가 된 도시 탄드란, 그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_ 248
부치지 못한 편지 - 전선에서 숨진 군부 군인이 아내에게 남긴 말 _ 255
군부의 만행, 현재 진행형·1
- 악마를 보았다, 세상으로 나온 추악한 학살의 증거 _ 257
군부의 만행, 현재 진행형·2
- 용서할 수 없는 자, 한녜인우 보고서 _ 264
군부의 만행, 현재 진행형·3
- 민병대와 암살단을 조직해 시민의 숨통을 조이는 미얀마 군부 _ 271
군부의 만행, 현재 진행형·4
- 만달레이 시민방위군의 비극: 보툰따욱나인, 변절자 혹은 첩자 _ 282
잊힌 전장, 그러나 계속되는 투쟁·1
- 최전방에서 싸우는 소수민족 여성 저격수, 세상이 잊어도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_ 294
잊힌 전장, 그러나 계속되는 투쟁·2
- 꺼지지 않는 등불, 총을 든 승려들 _ 294
잊힌 전장, 그러나 계속되는 투쟁·3
- 반군부 게릴라 아버지와 군부 부사관 아들, 혁명전선에 함께 서다 _ 307
잊힌 전장, 그러나 계속되는 투쟁·4
- 두 다리를 잃었지만 남은 두 팔로 혁명을 계속하리 _ 314
4부 맺는 글
맺는 글 _ 322
미얀마 시민혁명 연표 _ 326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2021년 2월 1일
웃풍이 드는 얇은 벽 사이로 스미는 새벽 공기가 이상하리만큼 서늘했다. 추위 때문인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떠진 눈. 하지만 좀처럼 이불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는다. 잠결에 이리저리 채이다 어딘가로 처박혔는지 좀처럼 잡히지 않는 휴대폰. 손바닥으로 매트리스 이곳저곳을 훑자 마침내 휴대폰이 손에 닿는다. 액정에 비친 시간은 오전 5시 31분. 그때 “쿵쿵” 거칠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도 이른 시간에 누구란 말인가?
“형, 빨리 문 좀 열어봐!”
앞집에 사는 P의 목소리다. 어릴 때부터 한 골목에서 자란 우리는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이른 새벽 소란에 어머니가 깰까 걱정된 나는 곧장 현관으로 나가 빗장을 젖혔다. P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 쿠데타야! 이 개새끼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어!”
‘쿠데타’. 이른 새벽잠에서 깨자마자 처음 들어야하는 말치고는 적절치 않은 단어. 순간 잠이 달아났다. 불현듯 며칠 전 만달레이에서 사는 사촌형이 시 외곽에서 장갑차가 돌아다니는 걸 봤다면서 “낌새가 이상하다.”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믿을 수 없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쿠데타라니.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한다. 나는 뛰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호는 먹통이다.
“와이파이도 전화도 죄다 끊겼어.”
파르르 떨리는 P의 눈가에서 황망함과 분노가 느껴진다. 일단 자세한 상황을 파악해야했기에 외투를 집어 걸쳐 입고 P와 함께 집 앞으로 나갔다. 평소라면 지저귀는 새소리와 아침잠 없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의 염불 소리로 평온한 새벽 골목은 온데간데없었다. 동네 사람 모두가 골목에 나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뜻한 얼굴로 애꿎은 휴대폰을 노려보며 서성이고 있다.
“개자식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들!”
옆집 아저씨가 러닝셔츠 바람으로 연신 울분에 차 욕설을 뱉어냈다. 몇몇 아주머니들은 통신두절로 분가한 자식들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메 수(어머니 수찌, 미얀마 국가고문 아웅산 수찌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가 체포됐어. NLD(민주주의민족동맹) 인사들과 국회의원들도 새벽에 죄다 끌고 갔대.”
P가 상황을 설명했다. 허망함과 들끓는 분노가 한데 몰려오며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난 5년 간 누려온 민주주의를 하루아침에 무력하게 빼앗기다니. 그러나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 정확히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좀처럼 실감할 수 없는 현실에 갈피를 잡지 못한 P와 나는 한참을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집이 아닌 골목 어귀에 있는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찻집 안은 동네 아저씨들과 청년들로 만원滿員이었다. 자욱한 담배연기와 누를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한 찻집 내부는 마치 한껏 가열한 압력솥을 연상시켰다. 자리를 잡고 앉은 P와 나는 밀크티 두 잔을 시킨 뒤 말없이 줄담배를 태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채 몇 모금 마시지 않은 밀크티가 차갑게 식어버리고, 옆에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가 수북하게 쌓여 더는 꽁초를 꽂을 공간이 없을 무렵,
“나온다!”
한 청년이 찻집 내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화면 속에서 연녹색 군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단 지긋지긋한 얼굴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간다.
“부정선거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발령한다. 향후 1년 동안 군이 나라를 통치하고 이후 공정한 선거를 치러 정권을 이양 하겠다.”
해묵은 레퍼토리가 죽지도 않고 또 찾아왔다. 찻집 내 장정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최악의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하루아침에 우리는 다시 군부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머지않아 소란은 찻집 밖에서도 벌어졌다. 동네 아주머니 여럿이 장바구니와 쌀자루를 이고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군부 쿠데타가 가져올 혼란을 이미 경험한 기성세대는 벌써 사재기를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간. 그러나 정오는 활기를 잃었고, 조국 미얀마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