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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기타 명사에세이
· ISBN : 9788962602814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11-08-24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_ 나, 이창호
1장 바둑을 만나다
갤러그와 무적의 형제
눈높이 부모님, 영혼의 언덕
바둑판 위에 그려진 우주
인생 최초의 멘토
즐거움이 재능이다
칭찬의 효과, 꾸중의 효과
배움을 청하다
운명의 스승을 만나다
한국바둑 내제자 1호
천재와 둔재의 기막힌 동거
강박과 몰입
입단의 기쁨과 이별
2장 거인의 어깨 위에서
소년기사, 프로 데뷔
본선 물고기가 되다
두터운 실리를 추구하다
이단의 명인을 만나다
복기의 힘
양날의 칼, 강박관념
첫 번째 사제대결
생애 첫 타이틀 획득
반상의 황제, 날다
숙명의 타이틀, 최고위
둥지를 떠나다
3장 승부는 세계로
균형을 발판삼아
도전과 응전, 시련과 영광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세계최강 한국의 깃발을 들다
마음을 담은 바둑
두터움 속의 민첩함
세계를 제패한 스승
프로바둑 1호 공익근무요원
징크스의 극복
고통의 에너지를 불사르다
4장 위기 속의 선택
변화의 물결 앞에서
‘나’보다 앞서는 ‘우리’에 눈뜨다
2005년 상하이의 기억
대국수의 후예를 상대하다
원숭이 왕과의 첫 대결
뚝심과 괴력의 하드펀처
최후의 결전과 최고의 순간
돌부처를 일으키는 힘
5장 다시, 원점에 서다
무관의 제왕과 백의종군
전진한다면 이들처럼
직업병의 명암
가시고기를 생각하다
함께 밥 먹는 여자
씹어 먹듯 책을 읽다
용기는 조심성으로부터
글씨는 쓰는 사람을 닮는다
에필로그 _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천재의 재능을 먼저 발견하지 못한다. 다만 그 행위의 비범한 결과를 보고 비로소 천재라고 부를 뿐이다. 따라서 천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다음과 같은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모든 아이들을 천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오래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내가 가진 최고의 재능은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둑에 관한 한, 주변 어른들의 눈에 비친 나는 싫증을 모르는 아이였다.
흔히 아이들은 주의가 산만하고 재미있는 놀이라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바둑은 더욱 그렇다. 손 이외에는 움직일 필요가 없고 대국자 간의 대화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데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인 생각(수읽기)을 요구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한 곳에만 꾸준히 앉아있어야 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보통의 아이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와 대국하든 한번 자리에 앉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둑판에 파묻히듯 미동도 없이 생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뚱한 표정으로 바둑판을 바라보는 나의 얼굴을 보며 신기하게 여겼지만 나는 그런 몰입의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고 마냥 즐거웠다.
딱지치기도, 구슬치기도, 전자오락도, 씨름도 재미있었지만 바둑만큼 나를 매료시킨 놀이는 없었다. 바둑을 배운 이후 그런 놀이들은 모두 시시해졌다. 한번 바둑판 앞에 앉으면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바둑계에는 내제자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내제자란 일본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린 도제(徒弟) 제도가 바둑계에 접목된 형태로,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을 함께하며 기예를 배우는 제자를 말한다.
선생님은 이 일로 “이제 겨우 서른둘인데 무슨 제자냐”, “창호네가 전주의 알부자라던데, 아마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매달 상당한 수업료를 받고, 입단하면 거액의 사례금을 받기로 했다더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억측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내제자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선생님이 일본유학 시절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선생의 내제자로 들어가 아무 대가 없이 가르침을 받았듯이, 나에게 또한 대가 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내가 그렇게 선생님 댁으로 들어섰을 때 불과 몇 년 뒤 우리 사제가 타이틀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과 나는 물론, 선생님의 가족도 나의 가족도 그 누구도 내가 가까운 장래에 ‘절대자 조훈현’으로부터 타이틀을 쟁취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훈현이 한국바둑 최초로 내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 관철동(한국기원 종로회관)에 퍼지자 선생님의 동료들은 일제히 “호랑이새끼를 키워서 나중에 물리는 거 아니냐”며 농담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특유의 속도감이 배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제자에게 지면 행복한 거지. 그래도 한 10년은 걸릴 거 아냐?”
이 무렵 나는 선생님과 그날의 대국을 검토하고 그 결과를 홀로 되새기는 과정에서 ‘바둑은 실수를 적게 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했다.
이는 싸움을 회피해온 내 바둑의 본질,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싸움을 피했던 것은 싸움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싸움의 수많은 변화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는 실수가 두려웠던 것이다.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시고백전백승, 비선지선자야.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했다.
무릇 승부에 임할 때는 자신을 다스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법이다. 나아가야 할 때는 주도면밀하게,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신중하게 기다려야 한다. 일단 전진하면 실패의 여지를 없애야 하고, 부동(不動)할 때는 불필요한 기미를 보이지 말아야 상대를 서서히 제압할 수 있다.
나는 의식, 무의식중에 입문시절부터 쌓아온 공부로써 하나의 확고한 가치관을 세웠다. 그것은 ‘두터움’이다.



















